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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지 못한 문제

그건 사랑이었을까

by 지안

엄마의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잽을 맞아가며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 묵직한 훅 한 방이 들어왔다.


아빠였다.


둘의 이혼 후에도 난 아빠와 간간이 연락을 이어가며 지내고 있었다. 살갑게 말 한마디 건네거나 날 향해 웃어준 기억은 없지만, 그럼에도 ‘아빠’이긴 했으니까. 어쩌다 한 번씩 안부나 묻는 사이로 지낼 생각이었다. 애초에 대단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전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늘 엄마와 싸우고, 연중행사처럼 온 집안을 때려 부쉈던 것만 빼면, (‘만’이라는 조사를 이럴 때 쓰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게 좋은 아빠까진 아니어도 최악의 아빠는 아니었다.


주말마다 광화문 교보에 데려가 책을 쌓아놓고 읽던 내 곁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주었고, 학교든 과외든 항상 차로 데려다주었으며, 내가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날로 사서 대령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 육성회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그 나름의 사랑 표현 방식일 거라 믿으려 애썼지만, 나의 아빠가 다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점은 늘 속상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에게 내가 느껴온 서운함과 야속한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인 탓에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게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진 않았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부모가 되지는 않으니까. 난 그의 눈에서 단 한 번도 미안함을 읽은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는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니라 미안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여름날, 아빠에게서 안부를 묻는 카톡이 왔다. 그는 새로 이사한 집에 대해 물었고, 나는 집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테리어 공사비를 아끼느라 시공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속을 썩고 있는 문제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러자 그는 선뜻 자기가 와서 고쳐주겠다고 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캠핑장을 할 때도 웬만한 건 본인이 뚝딱뚝딱 만들고 고쳐 쓰곤 했었다. 이미 여러 번 전문가가 다녀갔음에도 해결되지 않아 답답한 차이기도 했고, 딸이 처음 마련한 집이니 궁금하겠거니 싶어 그러라고 하고 주소를 일러주었다. 그는 집에 와 이것저것 손을 봐주고, 같이 점심도 먹고, 차도 마셨다. 거기까지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역시 집에 부르지 않았어야 했다.


그는 차를 마시다가 밑도 끝도 없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만난 지는 몇 달쯤 되었고, 누구에게 소개를 받았고, 자기 집에 와서 며칠 지내다 간다는 말까지 했다. 난 덤덤하게 그러냐고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저런 말을 굳이 나한테 왜 하지, 자기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나한테 인정이라도 받고 싶은 건가? 그의 의중이 이해되지 않았다.


뭔가 셈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그를 보내고 나서 설거지를 하다가였다. 만난 지 몇 달 되었다는 시간을 역산해 보니,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겨우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30년 넘게 같이 산 아픈 전 부인을 버리고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여친’을 사귀었다니 그야말로 할리우드 스타일 아닌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그걸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한다고? 그 후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난 연락을 피했다.


며칠 동안, 달뜬 표정으로 ‘여친’을 소개하던 그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엄마와 난 당신 때문에 불구덩이에서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이미 이혼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라며 놀랍지도 않다고 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랑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연락을 피했어요. 내가 어떤 부분이 용납이 안되는지는 아빠도 알 거라 생각해요. 아빠랑 좋은 관계 유지하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그의 답변은 참으로 그다웠다.


“네가 이해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겠지. 너는 뭘 좀 알고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피는 못 속인다고 할 말이 없다. 건강히 잘 지내라.”


내가 어떻게, 뭘 좀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거며, 대체 내가 당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길 바란다는 건가. 거기다 피는 못 속인다니, 내 몸속에 당신 피도 흐르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는 그동안 30년 넘게 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적어 보냈다.


설령 당신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의 불화로 나는 평생 고통스러웠고 거기에 대해 당신은 그 어떤 설명이나 사과도 해준 적이 없다. 지금도, 딸한테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못 하는 당신은 모든 걸 다 차치하고라도 어른스럽지 못하다. 당신은 단 한순간도 아빠다운 적이 없었다.


나의 절규하는 문자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답변은 ‘각자 살자. 보고 싶으면 보고 안 보고 싶으면 말고.’였다.


그렇게 나는 아빠라는 사람과 절연을 했다.


난 알았다. 냉혈한인 그와, 그리고 죽을 만큼 인정하기 싫지만 그를 빼닮은 나는 다시는 서로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내게 베풀어주었던 친절과 경제적 지원이 과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이었는지— 이젠 영영 그 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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