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걷히고 난 뒤
엄마와의 관계가 안정기로 들어서면서 내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 무기력하게 침대 속에서만 있던 날들은 점차 줄어갔다. 하지만 일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걸핏하면 체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고, 잠에 들면 아빠가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려 30분 단위로 잠에서 깼다. 내 진료기록에는 ‘신체화증상’과 ‘비기질성 불면증’이란 진단명이 더해졌다.
선생님과 상담을 이어간 지 여섯 달쯤이 지나서야 안개가 걷히듯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렇게 무너져버렸던 걸까.
아빠가 집을 나가고 아픈 엄마와 영웅이와 고립되어 지냈을 때부터 이미 내게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내가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는, 영웅이가 떠난 뒤 도전했던 사업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였다.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었던 나는, 그 실패까지 사실이 되어버리면 내 인생 전체가 망가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물도 삼키지 못할 만큼 온몸으로 처절하게 실패를 부정했다.
퇴사 이후 몰아닥친 부모의 불화, 기운 가세, 엄마와 영웅이의 투병, 그리고 남편의 해외 발령과 코로나까지. 내가 피할 틈도 없이 정면으로 그 모든 폭격을 맞고 있을 때에도, 전 회사 동료들의 소식은 꾸준히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누구는 시댁에서 강남에 집을 해줬다더라, 누구는 이번에 애를 낳아서 친정에서 천만 원이 넘는 조리원에 보내줬다더라.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내 멘털은 뿌리 뽑힌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우리 집이 더 대단한 집안이었으면, 그래서 수준 맞는 여유 있는 시댁으로 시집을 갔다면 좀 더 삶이 수월했을까? 그런 시답지 않고 못난 생각들에 사로잡혀 나는 매일을 자괴감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열등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고, 괴물처럼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 열등감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립초에 입학하면서 열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나는 열등감이란 감정에 내 마음 한편을 내어줘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대학교에 가면서 폭발했다.
학기 초, 동기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고 오가던 별 의미 없던 질문—‘너 어디 살아?’—이 나는 너무 싫었다. 다른 친구들 입에서 ‘압구정’이나 ‘청담’ 같은 부자 동네 이름이 나올 때마다 난 한없이 쪼그라들었고, 우리 집이 ‘창동’이라고 대답할 때마다 너무 창피했다.
나의 열등감을 가장 자극했던 존재는 청담동에 사는 과 동기 H였다. 아빠는 정형외과 의사였고, 언니는 첼로를, 동생은 미술을 전공한다고 했다. H는 항상 거리낌이 없었고, 내가 그동안 본 사람들 중 가장 당당했다. 그 애는 항상 직장인이나 들 법한 브랜드 숄더백을 메고 다녔는데, 내 가방이 더 비싼 거였는데도 그 애 앞에선 왠지 모르게 내가 한없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쟁쟁한 집안 자제들에 둘러싸여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의 열등감은 착실히 몸집을 키워갔다. 나는 내 노력과 열정과 시간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그들과 발을 맞추거나, 혹은 그들보다도 앞질러 나가고 싶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쌓인 열등감은, 결국 내 인생의 가장 아픈 순간에서 폭발했다.
사업이 실패한 뒤, 사람들이 모두 내 실패를 알고 비웃을 것만 같았다. 별 볼 일 없는 나의 근황을 안줏거리 삼아 비아냥거릴 그들의 모습이 선명히 그러졌다. 한 번씩 안부를 물어오는 지인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내 모습과 마주할 때면, 그런 내가 너무 후져서 화가 났다.
그러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유일한 방법이 ‘성공’이라고 믿게 되었다. 현실의 무게에 열등감이 더해지자 잘못된 믿음은 순식간에 강박으로 변했고, 나는 거기에 완전히 매몰되어 버렸다.
그래서 난 그만큼 절박했다. 절대 실패하면 안 됐다. 망할 수 없다고, 망하지 않을 거라고 매일 되뇌었다. 아니, 망하는 일 같은 건 결단코 있어선 안 됐다. 반드시 성공을 해내야만 한다는 자기 주문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기 확신으로 왜곡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내가 세워놓은 높은 성공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명백한 패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난 내 안의 아주 오랜 열등감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나를 짓눌렀던 성공에 대한 집착도 그 열등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난 그제야 나를 옥죄고 있던 집착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게 닥쳐왔던 모든 상황을 내가 타개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런 일들과 마주하게 된 건 그저 내가 운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설사 내게 상황을 해결할 책임이 있었다고 한들, 내가 갑자기 떼돈을 벌 현실적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도 씁쓸하지만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해결’이 아니라 현실을 최대한 잘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한 문장을 깨닫고 나서야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누군가의 삶이 부럽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그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남의 빵빵한 시댁을 부러워하며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나의 남편이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그와 경쟁하듯 바보 같은 농담을 던지고 이상한 춤을 추며 함께 웃는 순간에서 평온을 찾는 편을 택한다.
한때는 내 전부가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던 실패의 경험도, 조금은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매몰되어 있던 ‘성공’이라는 강박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니, 그 일이 내 존재 자체를 규정지을 만큼 치명적인 사건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꽤 많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