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와인바를 향하여
휴일(현충일)을 앞둔 목요일, 모처럼 손님들로 가게가 붐빈다. 지난번 방문했던 키 큰 20대 여성은 자신의 생일 파티를 위해 또 다른 늘씬한 친구와 함께 가게를 방문했다. 다행히 함께 온 친구도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별다른 말은 없다. 알고 보니 그녀는 한국말을 못하는 중국인이었고, 또 알고 보니 재방문한 그녀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 정말 한국인보다 잘하는 - 중국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했으나 중국어 한 마디를 기억하지 못한다. 짧은 영어로 와인 메뉴를 더듬더듬 설명해 보지만 나도, 한국말 못하는 중국인도 소통이 잘 안 되는 걸 서로 느낀다. 한국말 잘하는 단골손님이 중간에서 중국어로 통역하자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그래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와인과 안주 서빙을 끝마치고 물을 한 잔 마시는데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나지막이 울린다. 오늘은 장사가 좀 되는구나, 직감하며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는데, 이번엔 서양인이다. 아니 벌써, 우리 가게가 세계로 뻗어가는 것일까, 약간의 당혹감과 약간의 흥미로움이 표정에 담기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 서양인은 좀 특이했다. 남자인데 매우 선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온몸에, 심지어 얼굴에까지 이런저런 타투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귀에는 귀걸이가 아니라 커튼봉에 끼우는 링 같은 것을 귓구멍에 넣었다. 귀에 건 게 아니라 귓구멍을 직경 5센티 정도로 늘려 그 속에 링을 끼웠다. 링 너머로 앉아있는 손님들의 옆모습이 보였다. 링을 조준해 투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호: 항아리와 같은 통을 겨냥해 화살을 던져 넣는 전통놀이)
알고 보니 러시아인이었다. 영어를 곧잘 했다. 그리고 수다를 좋아했다. 조금 전 중국인 손님들과 십 여분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짧은 영어가 금세 길어지진 않았다. 더듬더듬 말 상대를 해주려 노력하면서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영어 회화 공부를 좀 했어야 하는데!'
그는 한국이 좋아 신길동에서 1년 반째 살고 있다고 했고, 동네 산책을 하며 괜찮아 보이는 카페나 바를 잠시 방문해 가벼운 음료나 와인 한 잔 정도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은근슬쩍 가게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 달라 요청해보기도 했고, 그는 흔쾌히 팔로우 신청을 해주었다.
문득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영어로 이름 정도 물어보는 건 자신 있었다.
"What's your name?"
그가 말했다. "And you?"
아니아니, 내가 먼저 물었잖소. 당신 이름부터 말해줘야지, 나는 살짝 웃으며 다시 말했다.
"No, No, well, your name first."
그가 다시 말했다. "And...you?"
거참, 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내 영어 이름 - Mike- 을 먼저 말해주고는 되물었다. "And you?"
그가 또다시 말했다. "And you."
거참, 흥미로운 이름이네. 이름이 Andyou(그리고 너는)이라니.
내가 실없는 웃음을 짓자 그가 다시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앤.드.류(Andrew)"
아...앤드류....앤쥬?(Andyou)가 아니고 앤드류...
러시아인의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한국인인 나의 영어 리스닝 실력은 여전히 녹슨 채로 남아있었다.
이름 교환하기에 지쳤는지 잠시 후 그가 가벼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가게문을 나섰다.
다시 울리는 가게 풍경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영어 공부 다시 해보자...그리고 아까 같은 경우엔 애초에 'And yours(소유대명사)?'라고 물어봤어야 했다!'
밤 열두 시,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나는 테이블을 서둘러 정리하고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들어갔다. 예전에 좋아했던 영어회화 유튜버가 이번에 새롭게 출간한 영어회화책, <빨모샘의 라이브 영어회화>를 주문했다. 최소한 올해 안에 이 책 다 뗀다,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