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주영 Sep 09. 2024

[소설]프롤로그. 짐 가방

[장편 판타지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모두 끝이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구역질나는 기억들도,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던 아침도 내일이면 없을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렸다. 검고 차가운 바닷물이 내 몸을 밧줄처럼 휘감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를 위해 길렀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파도에 휩쓸려 부드럽게 출렁인다.


 목구멍이 바닷물로 가득찼다. 의식이 희미해져간다. 누군가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발목을 아래로 잡아 끌며 유혹한다. 죽음의 신인가? 어서 오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깊고 푸르른 바닷속으로 스스르, 스스로 빨려 들어간다.


 안녕, 지겨웠던 내 삶이여.




[중간 지대 (middle-zone), 삶과 죽음의 경계]


“이제 가방을 올려 놓으세요. 무게 측정합니다.”

 마르티의 말에 여자가 자신의 짐 가방을 들어 저울 위에 올린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기운이 쭉 빠져서 인지 별로 크지도 않은 배낭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그녀가 짐 가방을 올리자 왼쪽으로 누워있던 저울 계기판의 바늘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띵동.’

경쾌한 알람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르티가 기다렸다는 듯 계기판을 확인했다.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색깔을 바라보던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흠, 빨간색이네요.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오히려 잘됐어요. 바늘이 노란색에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고민이 좀 되셨을 거예요. 이게 노란색에 아주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분들이 가장 고민을 많이 하시거든요. 쉬운 결정도 아니고 말이예요. 깔끔한 빨간색이라 쉽게 가겠어요.”


 마르티가 벙 찐 여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르티와 여자는 무균실처럼 새하얀 공간 안에 함께 있었다. 여자는 저울 위에 올려 놓은 자신의 짐 가방과, 짐의 무게를 나타내는 계기판의 색깔을 한 동안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계기판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한껏 치켜 떠보려 했지만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계기판의 바늘은 빨간색 위에 멈춰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다시 잴 수 없나요?”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마르티에게 쏘아붙였다. 여자는 어째서 <남은 마음>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겁게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리워할 남은 가족도 없다. 그만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기에, 무언가에 홀린 듯 차가운 바닷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세상에 남은 미련이나 여한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여자의 나이는 어느덧 90세. 모든 세월이 힘겨웠지만 그 중 마지막 8년은 특히 더 최악의 시간이었다. 처음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은 결혼기념일이었다. 여자는 마땅히 축하해야 할 결혼기념일에 자신의 집, 자신의 침대에서 엉켜 있는 네 개의 다리를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는 솟구치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의 남편은 무려 두 번이나 더 바람을 피우다가 걸렸고, 결국 두 사람은 8년 만에 이혼했다. 그 일로 여자는 우울증과 거식증에 시달리며 틈만 나면 구역질을 해댔다. 


 “잘못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시 잴 수도 없구요.”

 마르티가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남은 마음>의 무게를 재는 일을 하다 보면 별의 별 난동이 많이 일어난다. 이 정도의 신경질쯤 이야 몇 번이고 받아줄 수 있다.


 ‘띵동’ 

 그 때 여자와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옆 줄에서 <남은 마음>의 무게를 재고 있던 할아버지의 계기판이 반짝이며 소리를 냈다. 계기판의 바늘은 오른쪽으로 살짝 움직여 하얀색 영역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마음>의 무게가 아주 가벼운 할아버지다. 짐 가방의 무게 측정을 돕던 자가 할아버지의 가방을 저울에서 내려 놓고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은 밝은 얼굴로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할아버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 얼굴이 주름으로 뒤덮이고 등이 굽은 할아버지였지만,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양새가 아주 가뿐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활짝 미소를 짓는 바람에 마치 조각칼로 새긴 듯 얼굴에 더욱 깊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할아버지 옆에 있던 남자가 그를 부축하며 안개에 뒤덮인 것 같은 공간 쪽으로 손을 뻗어 방향을 안내했다. 할아버지는 안개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저 분은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하러 가는 건가요?”

의자에 앉은 채로 할아버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여자가 말했다.

“맞아요. <남은 마음>의 무게가 하얀색을 가리켰으니까요. 저도 정말 오랜만에 아주 깔끔한 하얀색을 보네요……. 그나저나, 미안하지만 이렇게 계속 지체할 수는 없어요. 보시다시피 대기줄이 장난 아니거든요.”

마르티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여자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모두 똑같이 생긴 짐 가방을 어깨에 맨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이제 되돌아갈 시간이에요. 자, 이거 마셔요.”

 여자는 마지못해 마르티가 건넨 주스통을 받아 들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그녀의 인생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가 주스 통을 깨뜨릴 기세로 꽉 움켜쥐자 주스 통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주스를 한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여자의 의식이 조금씩 흐려졌다. 가느다란 의식 끝자락에 마르티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다음번에는 가볍게 만나자고요.”




“콜록!”

 혼신의 힘을 다한 심폐 소생술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모래사장에 축 늘어져 있던 여자가 갑자기 머금고 있던 바닷물을 거칠게 토해냈다.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여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있었고, 그의 머리칼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바닷물이 누워있던 여자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의 곁에 그녀가 모래 사장에 벗어둔 신발 한 켤레가 얌전히 누워있었다. 두 사람 주위로는 네다섯 정도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떡해.’ ‘살았나봐.’라고 하며 웅성거렸다. 


 “왜…….”

 여자의 목구멍을 통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겨우 비집고 나왔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대던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녀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살렸어! 왜!”

 여자가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소리치자 그녀의 입에서 짜디 짠 바닷물이 한번 더 울컥 하고 쏟아졌다. 그 바람에 남자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모래사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여자는 단말마의 비명을 남긴 채 다시 의식을 잃었다.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