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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Sep 16. 2024

[소설] 4장. 입장 심사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공간에 들어가자, 희주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눈앞의 안개 같은 것을 치우기 위해 계속 손을 휘저었지만 소용없었다. 당황한 희주가 다시 레이먼이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하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손에 힘이 빠졌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죽음의 시계를 놓칠 뻔했다. 무슨 <댓플레이스>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겁나게 만들어 두었는지, 폐쇄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주저앉아 오줌을 누고 말았을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꼭 책임자에게 따져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희주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 힘에 희주의 몸이 순식간에 딸려갔다.


“한희주씨! 어서 와요!”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희주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레이먼이 있었던 삶과 죽음의 경계와는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희주는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모습이다. 인간 세상에서 흐릿한 영상으로만 보았던, 테라 어쩌고 탐사선이 발견했다던 바로 그 <파라스페이스>, 원래 명칭 <댓플레이스> 입구에 자신이 와 있다. 


“저는 미즈키라고 해요. 일본인이죠. 오느라 고생했어요.”

넋이 나가 있던 희주는 그제야 자신을 안개 속에서 끄집어내어 준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미즈키라고 소개한 이는 레이먼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고 일본어로 인사했지만 희주에게는 한국어로 들렸다. 희주의 팔을 붙잡고 끌어낸 강한 힘의 소유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매우 가녀린 몸집이었다. 미즈키는 까만색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고 위아래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희주씨, 제 손을 잡고 조심히 걸어오세요. 위를 바라보면 어지러울 수 있으니 가급적 위쪽은 바라보지 말고 조심히.”

미즈키의 말에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위쪽을 바라보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안개 속을 빠져나오느라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였는데,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공간감에 머리가 핑 돌았다.


<댓플레이스>는 공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넓었고, 사람도 삶과 죽음의 경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많았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희주의 머리 위쪽에서 거꾸로 매달려 걸어 다닌다는 것이다. 이곳은 어떤 커다란 공간을 마치 종이처럼 마구 구겨 놓은 것 같았다. 마치 중력이 360도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희주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떤 사람들은 벽을 타고 걸어 다니는 것 같았고, 벽을 타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천장으로 방향을 틀어 거꾸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거대한 아치형의 문이 보였고, 각 문 앞에 ‘1구역 1번’, ‘1구역 2번’ ‘1구역 3번’ 이런 식으로 심사대 번호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각 심사대 문 앞에는 미즈키와 똑같은 차림을 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면 그들은 얼른 연기 속으로 손을 뻗어 누군가를 끄집어냈다. 


“어디로 가는 거죠?”

희주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미즈키에게 물었다.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대로 갈 거예요. 인간 세상에서 화면으로 많이 봤죠?”

미즈키가 희주의 팔뚝을 잡고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 말에 희주가 화들짝 놀랐다. 인간 세상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아무 조치 없이 그냥 놔두다니, 희주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우리는 중간 지대라고 불러요. 이곳에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매일 1만 명 정도 된답니다. 중간 지대에서 <남은 마음>의 무게를 측정할 기회조차 없이 바로 <댓플레이스> 입구로 온 사람들, 그리고 희주 당신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모두 이곳에 모인답니다. 매일 19만 명이 넘는 영혼들이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받고 있죠. 심사대는 3,800개가 마련되어 있어요. 아, 이번에는 테러 사고로 갑자기 사망자가 확 늘어나는 바람에 임시 심사대 50개를 더 늘려서 3,850개네요.”


희주는 인간 세상에서 매일 같이 들었던 뉴스 보도를 떠올렸다. 매일 50명 정도의 사람들만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었던 파라스페이스 입구는 이 넓은 공간 중 딱 한 군데뿐이었던 것이다. 


“파라스페…… 아니, <댓플레이스>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살아있을 때 이곳 영상을 봤어요. 어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는걸요.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죠? 정말 지옥으로 가는 건가요? 인간 세상에서 이곳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왜 그냥 놔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요?”


희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미즈키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자자. 제가 하나씩 설명해 줄게요. 일단 저 테이블에 앉아요.”


미즈키가 흥분한 희주를 달래며 새하얀 테이블로 안내했다. 미즈키가 가리킨 책상은 금방이라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희주는 속으로 ‘괜찮아. 낭떠러지가 아니라 그냥 바닥이 구부러진 것뿐이야.’하고 되뇌었다. 


 “저는 <댓플레이스>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는 문지기 중 한 명이예요. 저쪽에 저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이 보이죠? 다들 문지기들이랍니다. 뭐 이해를 돕기 위해 천사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이곳에 새로 온 영혼들의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도와주고 있어요. 날개가 없어서 좀 실망했죠?”


 미즈키가 양손을 파닥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희주의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는데, 희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즈키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117세 희주에게는 너무 유치한 접근이었던 모양이다. 괜스레 민망해진 미즈키가 큼큼! 헛기침을 한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댓플레이스>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간단한 인터뷰를 거칩니다. 죽음이 시작된 순간을 알려주고 심사 보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10분 남짓 드리죠. 준비가 되면 심사대에 서서 심사를 봐야 해요. 결과는 심사대가 점수로 알려줍니다. 점수가 51점 이상이면 문이 열리고 50점 이하면 문이 열리지 않아요. 문이 열리면 인간 세상의 기억을 지워주는 망각 주스를 마신 후 바로 <댓플레이스>으로 들어가면 되고,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건 그때 가서 설명해 줄게요. 모두 설명하기에는 심사 시간이 빠듯해서요.”


 “점수는 어떻게 매겨지는 거죠?”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어요.” 

미즈키가 희주의 질문을 단칼에 거절했다. 희주는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다는 미즈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인터뷰 먼저 진행하죠. 희주씨, 죽음이 시작된 순간 기억하세요?”

미즈키의 질문에 희주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자신의 온 몸으로 파고 들던 폭발물 파편의 느낌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의 눈 앞을 불꽃들이 가득 채웠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테러 사고로 정신을 읽은 것까지 기억나네요.”

 “네, 그 이후 기억을 없으시겠지만 사고 이후 바로 앰뷸런스가 왔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미즈키의 말에 희주가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폭발물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 차디찬 바닥에서 객사한 최악의 죽음은 아닌 모양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죠? 방금 전에 중간 지대에서 들은 설명으로는 아직 몸 상태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수준인 것 같던데요.”

 “저희에게 넘어온 데이터는 여기까지네요. 음, 유족들의 메시지도 따로 넘어온 게 없고요.”

희주의 말에 미즈키가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유족들의 메시지요?”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랍니다. 임종을 지키는 유족들이 곁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가 심사대로 넘어오기도 해요.”


 그 말에 희주는 엄마를 떠나 보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때 의사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이미 눈을 감은 후였는데, 어머니가 들으실 수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하라고 하셨다. 그 때는 하염없이 우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엄마가 이 곳 심사대에서 자신의 우는 목소리만 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그나저나 자신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씁쓸하다. 하긴, 리노는 충전기에 꽂힌 채 집에 있을 것이고, 엠마도 아직까진 중환자실에 있을 테니 누군가 곁에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혹시 심사 전에 더 궁금한 게 있거나 좀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미즈키의 말에 희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심사를 보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더 할 것도 말 것도 없었다. 


 희주의 머릿속에 그녀의 지난 삶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세상에 공헌을 많이 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왔다. 기준을 알 수는 없지만, 딱히 떨어질 만한 사유도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테이블 위에 계속 앉아 있다가는 계속 낭떠러지가 눈에 아른거려 머리만 더 아플 것 같다. 여러모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시스템이다.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것도 기분 나빴는데 심사 기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심사부터 받으라니 말이다.


 “흠, 제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군요. 바로 심사 볼게요.”

 “맞아요. 지금 뭔가 준비를 한다고 해서 점수가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희주씨, 바로 뒤에 있는 저 문 앞에 서 보세요. 아주 잠깐이면 끝나요.”


미즈키의 말에 희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만한 높이의 거대한 아치형 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안개처럼 스며 나오고 있었다. 


희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다.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용광로처럼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겁게 달군 후,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실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곳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안락한 기운. 희주는 당장이라도 문 안 쪽으로 뛰어 들어가 안식을 취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 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든다면, 문이 활짝 열렸을 때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환희가 기다리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희주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깊은 생각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미즈키를 바라보았다. 


희주와 눈이 마주친 미즈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문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빨간색 버튼을 길게 눌렀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흘렀다.


‘띵동, 23점입니다. 대기하세요.’

경쾌한 안내음과 함께 문 위쪽으로 ‘23점’이라는 글자가 떴다. 그와 동시에 희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뉴스에서만 봤던 파라스페이스 입구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내가 될 줄이야.’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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