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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Sep 18. 2024

[소설] 5장. 문지기들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이런.”

 23점이라는 숫자를 보고 당황한 것은 희주뿐만이 아니었다. 미즈키도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진짜 뭔가 규칙이 있긴 한 건가요? 그냥 아무 점수나 막 뿌리는 거 아니야!?”

지옥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뭔가 베일에 싸여 있는 것 같은 친절하지 못한 이곳의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섞여 희주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희주는 다짜고짜 미즈키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힘껏 밀쳤다. 그러나 미즈키는 미동도 없었다. 전혀 밀쳐지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자, 마침 제 오늘 일정이 거의 끝나가요. 앞으로 두 명만 더 심사하면 되니 대기실에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늘 희주씨처럼 댓플레이스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랍니다.”


미즈키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듯, 자신을 밀친 희주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희주는 미즈키가 미동도 없자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곧장 지옥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 불행을 겪을 동료들이 파라스페이스, 아니 댓플레이스라는 데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디에선가 대기하고 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밀쳐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매일 있는 일인걸요.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자, 이제 다시 문 앞에 서면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희주는 미즈키가 자신도 처음엔 그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다가 이번엔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대기실인지 뭔지 거기로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씩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희주는 방금 자신의 점수를 측정한 문 앞에 다시 섰다. 희주가 문 앞에 서자 미즈키가 이번에는 문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파란색 버튼을 길게 눌렀다.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따가 봐요. 희주씨!”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아래로 내려간다고 예고해 준 미즈키에게 따질 새도 없이 갑자기 희주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이 열리며 희주는 그대로 떨어졌다. ‘악!’하는 외마디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주는 또 다른 공간에 도착했다. 희주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둥그렇게 둘러싼 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희주가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앞에 얼추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몇 명은 방금 도착한 희주를 둘러싼 채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고 있었고, 몇 명은 관심 없다는 듯 말없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대다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몇 점이요?”

“2…… 23점이요.”

희주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 중 한 남자가 다짜고짜 그녀에게 묻자, 희주도 엉겁결에 자신의 점수를 이야기했다.


“흠, 나보다 낮은 점수로구먼.”

남자는 희주의 점수를 확인하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켜 의자로 가버렸다. 그는 약간 할아버지 같은 말투와는 달리, 훤칠한 키에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 아니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외모와 말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희주는 그가 입고 있는 아주 때깔이 좋은 수트를 훑어보다가, 그것이 이내 엠마의 시상식 드레스를 빌렸던 명품 부티크 록산느의 한정판 수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도 웬만한 부자들은 엄두도 못 낸다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엠마가 늘 언젠가 갖고 말겠다며 사진을 보고 또 보고했던 덕분에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방금 도착한 한희주씨가 마지막이네요. 저희 심사대에서만 총 22명입니다. 제 이름은 미즈키예요. 여러분이 심사를 받기 전에 제 소개를 했었는데, 아마 다들 정신없어서 잊으셨죠? 저는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와 더불어 문지기들의 교육을 맡고 있답니다.”


희주가 남자의 차림새를 보고 입이 떡 벌어져 있는데, 어느새 도착한 미즈키가 한층 톤을 높여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즈키는 심사대에서 쓰고 있던 새하얀 가면을 벗은 상태였다. 당시에는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정확한 나이대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보니 거의 희주의 엄마 뻘 정도는 되는 여자인 것 같았다. 곧게 뻗은 짙은 아치형 눈썹 덕분인지, 그녀의 눈매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미즈키의 밝은 인사에도 사람들은 한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희주에게 말을 걸었던 고급 수트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몇 명이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아주 많으실거예요. 제가 쭉 설명을 끝내고, 그래도 궁금증이 남아 있다면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 우선, 제 목소리가 잘 들릴 수 있도록 가까이 모여 주세요.”

사람들이 미즈키를 둘러싼 채 오밀조밀 모여 앉자, 그제서야 미즈키는 믿기 어려운 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오늘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서 탈락하신 분들입니다. 여긴 문지기들의 대기실이고요. 아, 이 곳 말고도 대기실은 훨씬 많습니다. 7만 6천명 정도가 오늘 심사에서 탈락했어요. 심사에서 탈락한 분들은 재심사를 받을 수 있고, 재심사에 통과하면 <댓플레이스>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댓플레이스>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휴우-’ 하고 안도의 숨소리가 터졌다.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단, 재심사는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받을 수는 없어요. 재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이 곳에서 문지기로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저처럼요.”

문지기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잠시 긴장이 풀렸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미즈키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예사로운 말솜씨가 아니다.


“문지기로 일을 해야 한다니요? 저희가 당신처럼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담당하는 문지기가 된다는 말입니까?”

설명을 듣던 사람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미즈키에게 물었다.


“네, 맞습니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탈락해서 재심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아니 이제 영혼이라고 해야겠죠. 영혼 중에 하나예요. 앞으로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벌써 두 번이나 재심사에 떨어지고 계속 문지기로 일하고 있어요.”


희주는 그녀가 미즈키를 밀쳤을 때, 자기도 처음에는 그랬다며 무덤덤하게 반응했던 미즈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즈키가 일하는 모습이 너무나 노련하고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이 곳의 관리자쯤 되는 분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똑같이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서 떨어지고 재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라니. 희주는 갑자기 미즈키와 거리감이 좁혀 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실 테니 숙소에 들어가서 푹 쉬세요. 여러분이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각 숙소는 원래 지내던 집과 최대한 비슷한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교육은 내일부터 진행될 거예요. 지내는 동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고요. 자, 지금부터 질문 받도록 할게요.”


“그럼, 지옥으로 가는 건 아닌 거죠?”

초조한 얼굴을 한 누군가가 미즈키에게 물었다.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 이라니요?”

“사실 저도 지옥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교육받은 바가 없습니다. 정말 지옥이 있는지도 알 수 없고요. 그저 지옥에 누군가가 있다더라, 정도만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죠. 다만, 확실한 건 당분간 여러분은 이 곳 문지기들의 대기실에 머물게 될 것이고, 당장 지옥에 갈 일은 없다는 것 뿐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는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으니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시죠.”


미즈키가 지옥에 대해 언급하자,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미즈키가 지옥에 대해 더는 질문하지 말라고 딱 잘라서 말했지만, 궁금증과 불안함이 폭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관련 질문을 던졌다. 지옥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로 불구덩이에 들어가 인간 세상에서 남겼던 음식 찌꺼기를 다 먹어야 하는지 등등. 미즈키는 지옥과 관련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일관되게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 점수는 어떻게 측정되나요?

“죄송하지만 그것도 모릅니다. 그걸 제가 알았다면 이미 지금쯤 재심사에 통과해서 <댓플레이스>로 들어갔겠죠?”

“네? 당신도 모른다고요?”

“그럼 당신이 아는 게 뭐야!?”


물어보는 질문마다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미즈키에게 화가 난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희주는 혹시나 이 중에 인간 세상에서 한 주먹 했던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니, 이 중에 살인마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희주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마에게 당할 일 없는 이미 죽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한 건.”

흥분한 이들이 소동을 피우려하자 미즈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단호하고 카리스마 있는 음성이었다. 희주는 도저히 미즈키처럼 문지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는 재심사를 통과해서 <댓플레이스>로 입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끝도 없이 계속해서 재심사를 보고 있어요. 


희주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리고 그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직접 찾아야 합니다.”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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