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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Sep 20. 2024

[소설] 6장. 교육(1)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희주는 지난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머릿속에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떠나지 않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밤을 샜지만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은 하루라서 피곤할 법도 한데, 활력 음료를 양껏 마신 것처럼 기운이 넘쳤다. 


희주의 숙소는 놀라울 정도로 그녀가 살던 집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특색 없이 밝기만 한 조명, 너무 오랜 기간 사용해서 한 쪽이 푹 꺼진 소파, 다 마신 활력 음료 통이 가득 차 있는 쓰레기통, 텅 빈 냉장고, 침대 시트의 약간 꿉꿉한 느낌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다만, 리노만 없을 뿐이었다. 희주는 여기서까지 볼품없는 집에서 살아야 하다니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엠마의 집처럼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매끄러운 질감의 최고급 벨벳 소파가 갖추어진 공간이었다면 좋았으련만.


“희주씨, 컨디션 좀 어때요?”

문 밖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인 것을 보니 미즈키인 모양이다. 희주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애써 지우고 문을 열었다. 미즈키의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미즈키 뿐이다.


“잠을 한 숨도 못 잤어요.”

희주가 투덜거리는 말투로 미즈키에게 말했다. 


“그래도 컨디션은 아주 괜찮죠?”

미즈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문지기복을 전달해 주러 왔어요. 어제 안내해 드린 대로 10시부터 교육이 시작 될테니 이 옷으로 갈아입고 대기실로 와 주세요.”

미즈키가 구김 하나 없이 단정하게 손질된 새하얀 셔츠와 자켓, 바지를 희주에게 건네고는 이내 방 문을 닫았다. 희주는 생각보다 고루하지 않은 디자인의 문지기복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사이즈도 맞춘 것처럼 꼭 들어 맞았다. 


“이거 놔! 날 <댓플레이스>로 보내 달라고! 내가 누구인 줄이나 알아? 인간 세상에서는 나에게 말 한번 못 붙였을 것들이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난 이런 거지 같은 옷 절대 못 입어!”


희주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희주는 채비를 하다 말고 재빨리 문을 열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가십 거리에 민감한 연예인 매니저라는 직업 특성 상, 소란에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고상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입이 거친 한 여자가 문지기들에게 힘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대기실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미즈키가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 점수 기준을 모른다고 하자, 당신이 아는 게 뭐냐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여자다. 워낙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어서 뇌리에 남아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어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문지기복은 진작 내팽개쳤는지 바닥에 굴러 다니고 있었다. 


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여자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희주는 앞으로 이 곳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주가 몸 담았던 연예계도 아주 피곤한 업계였지만 그래도 버틸 만한 수준이었고, 대응 가능한 부류의 사람들만 만났었다. 희주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 <댓플레이스>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문지기 대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희주는 제각각 옷을 입고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하얀 수트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더 동질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험상궂은 인상 탓에 혹시 살인마가 아니었을까 의심했던 사람도 왠지 순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희주와 인사를 나누었던 조각 같은 외모에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가진 남자도 와 있었다. 그는 희주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씰룩거리며 눈인사를 건넸다.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희주는 그의 정체가 못 견디게 궁금했다.


“여러분 잘 쉬셨나요? 어제도 인사드렸지만 저는 문지기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미즈키입니다. 모두 하얀색 문지기복이 아주 잘 어울리네요.”

미즈키가 예의를 차린 인사말을 능숙하게 건넸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입을 닫고 미즈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첫날인 만큼, 여러분보다 일찍 와서 문지기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일을 하는지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자, 오늘은 나눠 드릴 게 많아요. 우선 이 송수신기를 받으세요. 지금 당장은 쓸 일이 별로 없겠지만, 나중에는 동료 문지기들과 커뮤니케이션 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어요. 그때 이 송수신기를 귀에 꽂아서 커뮤니케이션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가면도 하나씩 받으세요. 문지기 대기실이나 숙소에서는 상관없지만, 심사할 때는 꼭 이 가면을 쓰셔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가려주고 목소리도 변조해주는 기능이 있어요. 인간 세상에서 알던 사람을 심사하게 될 때도 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심사자에게 밝혀서는 절대 안됩니다. 여러모로 서로 알아봐서 좋을 게 없어요. 만약 자신의 정체를 고의로 밝힌다면 패널티를 받습니다.” 


미즈키가 송수신기와 가면을 나눠주며 말했다. 적응이 빠른 몇몇 이들은 송수신기를 귀에 꽂아 보기도 하고, 새하얀 가면을 얼굴에 써 보기도 했다. 똑 같은 복장에 가면까지 쓰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희주는 가면을 쓴 사람들끼리 서로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왠지 기묘하게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책을 나눠 드릴 거예요. 오늘 <댓플레이스> 입구에 도착 예정인 사람들의 프로필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나이, 사망 시각, 사망 사유, 직업, 특이사항이 간단히 요약되어 있어요. 나중에는 이 프로필을 보면서 직접 인터뷰도 하셔야 하니 꼼꼼하게 익혀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리고 맨 상단에 ‘담당 문지기’란이 보이죠? 그 곳에 이름이 적힌 분이 바로 오늘 여러분이 따라다닐 문지기입니다.”


미즈키에 말에 희주가 얼른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주가 따라다닐 담당 문지기는 미즈키였다. 희주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미즈키는 어딘지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작고 여리 여리한 체구이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있고, 언변도 유려했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의 배경에 개의치 않고 모두를 평등하고 단호하게 모습도 인상 깊었다. 


“잠시 후에 담당 문지기들이 여러분들을 데리러 들어올 겁니다. 교육 과정에 충실하게 참여해 주세요. 오늘 교육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 분이 소란을 피우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어요.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문지기 관리자들과 개별 면담을 하게 되고, 재심사 순서가 제일 마지막으로 밀리게 됩니다. 그만큼 <댓플레이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늦어지는 것이니 주의해 주세요.”


희주는 <댓플레이스>로 보내 달라며 난동을 피우던 여자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재심사 기회가 제일 마지막으로 밀리다니 아주 적절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희주의 재심사 순서가 하나 앞당겨 졌을 것이다. 희주가 언제쯤 재심사를 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대기실 입구로 한 무리의 문지기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익숙하게 자신이 챙겨야 할 신입 문지기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미즈키도 희주에게 다가왔다.


“희주씨, 우리도 가요. 먼저 가면부터 쓰고요.”

미즈키가 다정한 손길로 희주의 얼굴에 가면을 씌워주며 말했다. 가면은 얼굴에 거푸집을 떠서 만든 것처럼 꼭 맞았다. 희주는 미즈키의 눈동자에 비춘 가면 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은 없어지고 다른 사람만 눈동자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프로필은 좀 읽어봤어요? 제 경험상, 첫 번째로 만날 분은 무난하게 <댓플레이스>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미즈키의 말에 희주는 시큰둥하며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심사에 통과하지 못하고 여태 문지기 일을 하고 있을까? 게다가 다른 사람이 <댓플레이스>에 들어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희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즈키가 희주의 손을 잡고 대기실 한 쪽 벽으로 가더니 벽에 손을 올리고 ‘1구역 심사대 1871번’이라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희주의 머리 위 쪽에서 누군가 강력한 진공 청소기를 가동하고 있는 것처럼 희주의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놀랄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희주는 댓플레이스가 어디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로 어제, 그녀가 심사를 봤던 곳이다.


“이봐요, 미즈키! 미리 예고편 좀 틀어주면 안될까요?”

희주가 미즈키에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갑자기 바닥을 열어 자신을 문지기 대기실로 보내 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었는데, 두 번은 못 참는다.

“아! 미안해요 희주, 제가 워낙 앞만 보고 가는 성격이다 보니 배려가 부족했네요. 미안합니다.”

미즈키가 즉각 깔끔하게 사과하자 더 투덜대려던 희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오실 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온 분이네요. 방금 레이먼을 만나고 오셨어요. <남은 마음> 무게가 아주 가벼운 분이에요.” 

미즈키가 손에 든 책을 훑어보며 말했다. 방금 측정한 <남은 마음> 무게 정보까지 바로 업데이트 되는 모양이다. 


“곧 이쪽에서 연기가 서서히 피어 오를거예요. 중간 지대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공간을 거쳐왔던 거 기억하죠? 중간 지대와 여기 심사대를 연결해주는 통로랍니다. 연기가 사람 키만큼 완전히 커지면 그 때 연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연기 때문에 형체가 잘 보이지 않을 테니 연기 속을 휘휘 저어서 찾은 후 가볍게 끌어당기면 돼요.”


미즈키가 한 쪽 팔을 휘휘 저으며 시범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희주는 왜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데려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기 속에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거나 너무 무거워서 놓치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리가 끌어당기는 건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예요. 너무 무거워서 놓치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미즈키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 때 연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첫 번째 손님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궁금하고 답답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은 우선 첫 번째 손님 맞이에 집중할 때이다. 희주는 긴장된 나머지 괜히 자켓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희주씨, 연기 속에서 끄집어 내는 거, 직접 한번 해봐요.”

“네? 갑자기요?”

갑작스러운 미즈키의 제안에 희주의 머릿속이 지금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가 가득찬 듯 새하얘졌다. 희주는 죄 없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희주는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차라리 미즈키가 옆에 있을 때 해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피어오르던 연기가 순식간에 커지며 위로 솟구쳤다. 


“지금이예요!”

미즈키가 소리치며 희주의 등을 연기 기둥 쪽으로 살짝 밀쳤다. 그 바람에 희주는 반강제로 연기 속으로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희주는 반사적으로 연기 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휘저어 봐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연기 속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당황한 희주가 계속 연기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분명히 있어요. 조금만 해봐요!”

소리치는 미즈키의 등줄기에도 땀이 삐질 흘렀다. 신입 문지기를 맞이하는 일은 늘 겪는 일이지만 언제나 연기 속에서 영혼을 찾아내는 코스가 가장 어렵다. 


“찾았다!”

그 때, 희주의 손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희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기 속을 헤매고 있던 이를 힘껏 끌어당겼다. 생각 외로 무거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거울 거로 생각하고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순간 균형을 잃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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