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첫날이 지나고, 문지기가 되어 맞이하는 두번째 날이 밝았다. 희주는 이 곳의 업무량에 혀를 내둘렀다. 물밀듯이 몰려오는 심사 대기자들 때문에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빽빽하게 심사를 진행해야했다. 어쩌다가 극적으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된 자들이 있다면 그 때서야 겨우 한 타임 정도 쉴 수 있었다. 가끔 난동을 부리는 아주 머리 아픈 영혼을 만나게 되면 그 일을 처리하느라 업무 시간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문지기 대기실이 아니라 지옥이 틀림없어.”
희주는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심지어 자신의 담당 문지기인 미즈키가 오늘은 특이 케이스에 대해 설명해줘야 하니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오라고 하는 바람에 별로 뭉그적거리지도 못하고 문지기 대기실로 가야만 했다. 미즈키는 일만 하다가 과로사로 죽었다면서 왜 사후 세계에서까지 이렇게 열심인지, 희주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씨, 왔어요? 어제는 정말 정신없었죠?”
희주보다 훨씬 일찍 나와 오늘의 심사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 놓은 미즈키가 대기실로 들어오는 희주를 반기며 말했다. 구시렁거리며 들어오던 희주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심사를 진행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케이스를 만나게 되는데, 오늘 같은 특이 케이스는 저희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해요. 마침 오늘 심사 목록에 있어서 미리 알려주고 실습도 하면 좋을 것 같아 일찍 불렀어요.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봐요.”
미즈키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심사 대기자들의 프로필이 담긴 책을 펼치며 말했다. 희주는 살아 생전 미즈키 같은 피곤한 상사를 만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케이스가 있을지 호기심도 들었다. 희주가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케이스인데요?”
“타인을 죽인 자, 그로 인해 죽은 자, 혹은 죽은 자의 유족이 우연히 동시간대에 심사를 받게 되는 케이스예요.”
“뭐, 뭐라고요?”
미즈키의 말에 희주가 뒷걸음을 치며 말을 더듬었다. 지금 살인자를 심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희주를 에워싼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조금 놀랐죠?”
“조금 놀랐냐고요? 방금 저 까무러친거 안 보이세요? 미즈키 제발 예고편 좀 미리 주세요.”
희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오래 앓던 편두통이 도지는 기분이었다.
“예고편이라고 생각하고 말 한건데…… 제가 아직 부족해요. 미안해요.”
미즈키가 말했다. 또 다시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미즈키에게 희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 계속 해보세요.”
희주가 두근대는 심장을 겨우 잠재우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미국의 한 대형 쇼핑몰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으로 9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중상을 입었죠. 워낙 큰 사건이라 아마 한국에도 보도가 되었을거에요.”
미즈키의 말에 희주의 머릿속으로 한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희주도 어렴풋이 그 기사를 보고 분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현장에서 경찰의 총에 맞았는데, 죽진 않았어요. 대신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복역 중에 병을 앓다가 결국 오늘 아침 사망했어요.”
“죗값을 덜 치르고 너무 평온하게 죽었네요.”
미즈키의 설명에 희주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런 인간들은 자신이 가한 고통의 두배, 세배의 벌을 받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사건으로 딸을 잃었던 아빠도 노환으로 사망했어요. 거의 비슷한 시간대였죠. 심사대 배정은 랜덤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혹시나 이 사람들이 같은 심사대를 이용하지 않도록 문지기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해요. 이런 매뉴얼이 없던 과거에는 유족들과 살인자가 하나의 심사대에서 대면하게 되면서 난리가 났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정말 이상하고 비효율적이네요.”
가만히 미즈키의 설명을 듣고 있던 희주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뭐가요?”
“그렇잖아요.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은 어차피 댓플레이스 심사 점수가 바닥일텐데, 꼭 심사를 해야 하는 건가요? 사망자나 유족들과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말이에요!”
“나도 희주씨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지만, 이 곳의 규칙이 그래요. 모두에게 동일하게 심사의 기회가 주어지고, 심지어 무사 통과하기도 하죠…….”
미즈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입술 끝이 씁쓸했다. 희주에게 설명하면서도 그런 결과가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돼! 통과라고요? 당신과 나도 통과 못한 그 문을 살인마가 통과했다고요?”
희주는 거의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이 곳은 정말 최소한의 보편 타당성조차 없는 기가 막힌 곳이다.
“이 곳의 규칙을 한낱 우리 같은 문지기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속죄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미즈키가 희주를 달래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흥분할대로 흥분한 희주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속죄할 기회요? 그들이 속죄하면 억울하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나요? 피해자들이 용서하지 않는데 가해자가 속죄하면 끝나는 건가요? 피해자들의 고통은 지워지지 않을거예요. 유가족들이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그 끔찍한 고통과 기억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거라고요.”
그 말을 뱉은 순간, 희주의 머릿속에 수한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던 충격이 되살아났다. 희주는 사시나무 떨 듯, 몸서리를 쳤다. 속이 울렁거리며 또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만, 이렇게 타인의 삶에 심각하게 상처를 남긴 사람들은 다른 벌을 받는 답니다. 이것도 특이 케이스이니 꼭 기억해둬요.”
다른 벌을 받는 다는 말에 씩씩거리던 희주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미즈키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피해자나 유가족들이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끔찍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죠? 살인자들에게는 그와 똑 같은 벌이 주어집니다. 비록 댓플레이스 심사에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망각 주스를 주지 않아요.”
“망각 주스를 주지 않는다면…….”
“맞아요. 댓플레이스에 가서 자신의 잘못을 계속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벌을 받는 거죠.”
“그게 무슨…… 고작 그게 벌이라고요? 모르겠네요 정말.”
희주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수록 답답하고 화 나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기준도 알 수 없이 열리고 닫히는 문짝 하나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희주씨 기분 저도 충분히 이해해요. 하필 두번째 날부터 이런 힘든 케이스를 만났네요. 자, 충분히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이제 갈 시간이예요. 우리 심사대에서는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질렀던 자를 심사하게 될 거고, 딸을 잃은 아빠는 1825번 심사대에서 심사를 받게 될 거예요. 희주씨는 시간 맞춰 1825번 심사대에 견학을 다녀오도록 하세요.”
미즈키가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와 책을 덮으며 말했다. 희주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미즈키처럼 이렇게 덤덤하게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연기 기둥에서 영혼을 빼내는 일은 제가 할게요. 심사대 앞에서 잠시만 기다려요.”
희주의 상태를 살피던 미즈키가 희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무턱대고 일을 몰아붙이면 탈이 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온다.’
희주가 심사대 앞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멀리서 미즈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비쩍 마른 한 남자가 생소한 공간이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미즈키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남자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폈고, 이 곳의 규칙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다. 미즈키가 그를 심사대 앞 테이블로 안내한 후 절차에 따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워낙 큰 일을 저질렀기에 인터뷰가 길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드디어 그가 입장 심사대 앞에 섰다. 그는 심사대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방망이질 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살인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희주씨, 준비됐냐고 물어보고 준비됐다고 하면 빨간 버튼을 길게 누르면 돼요. 한번 해봐요.”
미즈키가 희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희주의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주, 준비됐나요?”
희주가 겨우 입을 떼고 말했다. 희주는 그제서야 곁눈질로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하게 생겼을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독기가 쭉 빠진 듯 맑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까지 흥분하며 방방 뛰었던 희주 자신의 눈빛보다 훨씬 상태가 나은 듯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가 떨리는 손으로 빨간색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속으로 ‘파란색 버튼이랑 헷갈리면 안돼.’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띵동, 51점입니다. 입장하세요.’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