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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ul 20. 2020

오해받을 용기, 있으신가요?

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한 당신에게

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하는 종류의 모험가. 나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_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싶어 p.85


이 책은 한밤중 아끼며 한 개씩 꺼내먹는 곶감처럼 읽고 있다. (덕분에 읽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완독을 못했다)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내 생활에 반추해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읽고 난 후엔 한참을 눈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다른 에세이들처럼 후루룩 쉽게 읽어 넘길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공감을 하고 있어서일 테다.


사진과 글은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이 평온해져서 올려봅니다.


이 챕터를 읽다가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책에서는 꽤 플러스적인 요소의 '오해'들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오해 그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덮쳐왔다.


회사에서는 그동안 맡았던 직무 특성상 조금은 엉뚱하고 낯선 시도들을 많이 해왔기에 (물론 회사의 예산이 부족하다면 실패하지 않은 정도의 시도들만 해야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하는데는 어떤 의도가 깔려있을거라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왔다. 그 오해는 (특히 내 결과물/업무성과가 좋을수록) 음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억울했고, 다음엔 사실관계를 알리려 적극 해명했으나, 나중엔 그러려니 하고 무뎌졌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없는 얘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프레임에 나까지 휘둘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할 때는 특히, 오해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심심한 것보단 그게 훨씬 나았다. 그당시 나에 대한 이성들의 오해는 매력으로 작동되기 쉬웠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잘 이용해온 것도 같다. 그치만 나이들고나니 그런 욕구도, 에너지도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내 기본 성향이란 건 남아있을 것이다. 연애에 돌입하게 된 상대와는, 관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자연스레 오해가 이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뭐, 이해가 100%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누군가를 100% 이해해야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과정과 노력 자체에 사랑의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에겐 어땠을까. 여성은 확실히 좀 더 디테일한 존재들이기에, 그들 모두가 나를 어떻게 여겼다고 한 그룹으로 묶어서 단정지을 순 없겠다. 그리고 남사친이라도, 성애적 관계가 아닌 이상 오해가 기분 좋게만 또는 매력으로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오해만을 받고, 누군가에겐 이해만을 받고, 누군가에겐 오해와 이해가 뒤섞여 있었겠지.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 내게 한번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오해로 멀어지는 친구가 아쉽고 안타  넘어서서 아팠다. 내가 혹시 오해를 받게 행동하거나 말하지는 않았을까 자책도 많이 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알았다. 오해가 이해로 바뀔만한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진짜 친구로 지속될  있다는 . 혼자 오해하고 멀어졌다면, 우린   정도 사이인 . 그래서 그게 비록 거친 방식이라 해도 오해를 확인해주는 친구는  고맙고,  자신도 계속 친구로 남고픈 이에겐 오해를 풀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치곤 한다. 세상엔 '아니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경우'  많다.


오해받을까 두려워 움츠려 살지 말자.
오해받을 용기가 있어야
이 세상이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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