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한 당신에게
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하는 종류의 모험가. 나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_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싶어 p.85
이 책은 한밤중 아끼며 한 개씩 꺼내먹는 곶감처럼 읽고 있다. (덕분에 읽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완독을 못했다)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내 생활에 반추해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읽고 난 후엔 한참을 눈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다른 에세이들처럼 후루룩 쉽게 읽어 넘길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공감을 하고 있어서일 테다.
이 챕터를 읽다가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책에서는 꽤 플러스적인 요소의 '오해'들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오해 그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덮쳐왔다.
회사에서는 그동안 맡았던 직무 특성상 조금은 엉뚱하고 낯선 시도들을 많이 해왔기에 (물론 회사의 예산이 부족하다면 실패하지 않은 정도의 시도들만 해야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하는데는 어떤 의도가 깔려있을거라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왔다. 그 오해는 (특히 내 결과물/업무성과가 좋을수록) 음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억울했고, 다음엔 사실관계를 알리려 적극 해명했으나, 나중엔 그러려니 하고 무뎌졌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없는 얘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프레임에 나까지 휘둘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할 때는 특히, 오해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심심한 것보단 그게 훨씬 나았다. 그당시 나에 대한 이성들의 오해는 매력으로 작동되기 쉬웠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잘 이용해온 것도 같다. 그치만 나이들고나니 그런 욕구도, 에너지도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내 기본 성향이란 건 남아있을 것이다. 연애에 돌입하게 된 상대와는, 관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자연스레 오해가 이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뭐, 이해가 100%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누군가를 100% 이해해야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과정과 노력 자체에 사랑의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에겐 어땠을까. 여성은 확실히 좀 더 디테일한 존재들이기에, 그들 모두가 나를 어떻게 여겼다고 한 그룹으로 묶어서 단정지을 순 없겠다. 그리고 남사친이라도, 성애적 관계가 아닌 이상 오해가 기분 좋게만 또는 매력으로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오해만을 받고, 누군가에겐 이해만을 받고, 누군가에겐 오해와 이해가 뒤섞여 있었겠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내게 한번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오해로 멀어지는 친구가 아쉽고 안타까운 걸 넘어서서 아팠다. 내가 혹시 오해를 받게 행동하거나 말하지는 않았을까 자책도 많이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알았다. 오해가 이해로 바뀔만한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진짜 친구로 지속될 수 있다는 걸. 혼자 오해하고 멀어졌다면, 우린 딱 그 정도 사이인 걸. 그래서 그게 비록 거친 방식이라 해도 오해를 확인해주는 친구는 참 고맙고, 나 자신도 계속 친구로 남고픈 이에겐 오해를 풀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치곤 한다. 세상엔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경우'가 참 많다.
오해받을까 두려워 움츠려 살지 말자.
오해받을 용기가 있어야
이 세상이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