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떴는데 창 밖을 보니 비가 온다(또!). 지난 6월 말부터 계속된 장마였다. 전국적으로 수해도 컸다. 올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시대는 도무지 저물 줄을 몰랐다. (심지어 일요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시 2단계로 격상된다고 한다.) 바야흐로 (언제나 그렇긴 했지만 2020년 여름은 더더욱) 이불 밖은 위험한 시대가 되었다. 화창한 여름날, 덥긴 해도 밖을 돌아다니며 햇살과 초록숲들을 즐기는 나였는데. 이제 대체 언제적 얘기가 됐으며, 언제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 얘기였다. 나도 모르게 한숨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휴, 질린다"
'지겹다'를 넘어선 '질린다'는 감정. 우리는 반복되는 어떤 것에 지겨운 감정을 쉽게 느낀다. 게다가 나처럼 MBTI가 ENFP인 사람은 지겨운 것을 다른 이들보다 더더욱 못 견뎌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내 생활이 너무 단조롭거나 지겨워지지 않도록 적정한 균형점을 잘 맞춰오곤 했다. 돌이켜 봐도, 지난 사십여 년을 그렇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향은 쉽게 오해를 산다. 곁에서 나를 오랜 시간 지켜보지 않은 이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지내왔다. 다행히 남들의 평가보다 나 자신의 평가나 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훨씬 더 큰 타입이라 이런 오해 속에서도 내 자신을 꿋꿋하게 잘 지키고 성장시키며 살아온 듯도 하다.
학생 때는 별로 공부를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성적이 잘 나오는 것 같다거나 (그래서 남들이 안 보는데서 잠 안자며 공부를 할 것이라는 소문, 아니면 별 것도 없는데 성적이 잘 나오니 재수 없다는 얘기 등), 결과물이 좋긴 하지만 평소에 그리 힘들여 일하는 것 같지 않아서 짠한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거나(나는 원래 번잡스럽게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나 지금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는 티가 잘 안 난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런 스타일이 되고 싶지도 않다.), 호불호가 강한 것 같아서 내게 찍히면 끝날 것 같다거나(좋아하는 것을 오래도록 좋아하고, 싫어하게 된 것에는 억지로 다시 좋아하려는 에너지를 쓰지 않을 뿐이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기에. 싫어하는 부분에 대한 건 업무적인 부분이 얽혔을 때가 많은데, 내가 갑의 위치에 있는 기업의 소속이었던 적이 많아 저런 얘기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뭘 찍고 어쩌고 가 아니라, 못 미더운 순간이 오면 내가 다 끌어안아서 일을 하고 만다. 이렇듯 일할 때는 내가 내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 훨씬 많지만, 조용하게 처리해버리곤 하기 때문에 내 속내는 아주 가까운 동료들 밖에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뭐 그런 일들.
언뜻 봤을 때는 모든 일에 금방 싫증을 느껴서 변덕이 심한 성격인 건가 싶을 수도 있겠다. 싫증을 잘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싫증을 느낄만한 일은 금방 알아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꾸준하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라고 납작하게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나를 잘 아는 후배는 나에 대해 이렇게 명명했다. "선배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앞으로 이 매거진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홍대 일대를 좋아한다. 지난 2007년부터 합정 상수 홍대 서교 망원 연남 일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단골 식당과 카페들은 모두 이 곳에 있다. 13년 동안 이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아직도 질리지 않았다. 여전히 좋아한다.
제주를 좋아한다. 제주는 나 홀로 여행지로 처음 선택한 곳이었다. 2013년 불안하지만 애써 씩씩한 채 하며 제주에 혼자 첫 발을 내딛고, 그날 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마주하고 알게 됐다. 내가 이 곳을 정말 오랫동안 사랑하게 되고 말 거란 걸.
내 일을 좋아한다. 홍보 마케팅 분야에 발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수차례 직무를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내 일이 질리지 않는다. 여전히 재밌고 여전히 배울 것도 많다.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는 아빠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다. 이건 몇 년을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힘들 만큼 오랜 세월이 누적됐다. 단골 커피숍 몇 군데는 십여 년 이상을 다닌 곳도 있을 정도다.
빵을 좋아한다. 다양한 종류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달지 않고 식감 자체를 느낄 수 있는 빵을 좋아한다. 지난 회사를 다닐 때는 6개월여 동안 아침마다 똑같은 빵을 먹어서 주변 동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배고프다는 동료가 있으면 그 빵을 나눠주곤 했으므로 그들이 알게 되었는데 한 2주쯤 뒤부터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팀장님 그 빵 안 질리세요?"
시를 좋아한다. 2012년 무렵부터 시를 접하게 됐고 좋아하게 됐다. 요즘은 그 시절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좋아한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영화 마니아들은 많은데 드라마는 그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난 확실히 호흡이 긴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더 내 취향이다.
공연을 좋아한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 어떤 인디밴드를 처음부터 눈여겨보고 그들의 공연을 많이 다녔다. 그들의 단독 공연이 없을 땐 그들이 나오는 페스티벌도 열심히 다녔다.
성시경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콘서트를 다닌지도 이제 벌써 십수 년이 되었나 보다. 함께 보낸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쌓였다는 사실도, 함께 늙어가는 것도 좋다.
옹성우를 좋아한다. 프듀 같은 프로그램을 싫어해서 안 봤는데 어쩌다가 막방을 보고 성우에게 치였다. 내가 이 나이에 아이돌을 이렇게나 좋아하게 될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해외 팬미팅까지 다녀왔으니 말 다 했지...) 성우는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존재다. 나보다 한참 어려서 삶의 경험도 더 적지만, 그 친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작년부터는 내 애인을 좋아한다. 이번 여름은 비가 많이 온 덕분에 애인과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전혀 질리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매일 까르르까르르 웃느라 바쁘다. 그는 나를 여러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변화하고 싶게 만든다. 내가 몰랐던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 안에 있던 욕망을 억압하지 않게 하고 자연스레 꺼내놓을 수 있게 도와준다. 어떤 면에서는 유교걸이었던 나를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내 애인은 내게 여전히 매력적인 존재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 나는 좋아한다라고만 표현하기엔 모자랄만큼 듬뿍 애정하고 사랑한다. 처음엔 평범할 수 있지만 볼수록 매력적이고 웃는 표정이 특히 예쁜 내 얼굴도, 별다른 관리없이도 괜찮은 내 몸도, 이기적일 것만 같지만 사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가장 먼저 더 많이 배려하는 내 마음도, 세상 풍파 많이 겪고 살아왔지만 여전히 때묻지 않고 순수한 점도, 점점 진보적이 되어가고 있는 정치성향도, 많은 돈 들이고 경험해 애써 찾고 성취해온 내 취향도, 여전히 세상을 배울 줄 알고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 내 태도도,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나 자신도 마음 쓰이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아는 세련된 내 화법도, 그치만 필요할 땐 좋은 건 왜 좋은지 아닌 건 왜 아닌지 분명하게 말하고 설득해낼 수 있는 용기도, 기본적으로 센스가 있어 옷도 꽤 잘입지만 저런 센스를 기본으로 갖추고 일잘러가 된 것도, 다 마음에 든다. 나의 모든 것을 향한 애정은,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 변치 않고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애정 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