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지난봄에 쓰인 글이라, 봄 시점입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었다. 코로나19는 전염력이 매우 강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난리였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매일 뉴스에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운데, 그래도 기어이 봄은 왔다. 평일에 회사-집-회사-집만 반복하던 사람들은 주말이 되자 그나마 폐쇄된 공간이 아닌 야외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짧아지는 봄, 지금을 놓치면 이 어여쁜 꽃들을 볼 수 없다는, 아주 그럴싸한 핑계였다. 모든 사람들이 무언의 약속이나 한 듯. 덕분에 나도 꽃구경을 핑계 삼아 친구와 함께, 마당에 목련나무가 있어 유명한 한 카페에 가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카페 인근에 활짝 핀 목련꽃들을 보며 감탄을 했다. 인간이 자행한 일들로 발생했을 바이러스로 고통받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콕하는 동안, 자연은 본인들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구나. 그들의 할 일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경이롭고도 아름답구나. 목련으로 유명한 카페 '왓코'는 평소엔 야외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는 모양인데, 다행히 사람들이 덜 몰리는 시간에 도착해 겨우 한 테이블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목련맛집 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카페답게, 커피가 맛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련나무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함께 온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들 사진에 내 모습이 조금이라도 걸려서 인스타그램에 올라갈까 봐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아, 커피를 시켜야지 참! 집에서 내내 드립백만 마셔왔었는데, 오랜만에 남이 내려주는 커피라니 뭘 마셔야 할까 행복한 고민 속에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 까페라떼를 주문했다. 작년에 유방암 선고를 받을 뻔한 이후로, 소들의 착유 과정과 그 이후에 대한 영상을 본 이후로, 실로 오랜만의 까페라떼였다. 새삼 비건을 실천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나 했다. 나 같은 미물은 이렇게나 완벽한 실천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실천하겠다고 선언조차 못하는 것이다.
카페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와 경의선 숲길을 걸으며, 다시 단골 밥집에 가는 길이 당인리 발전소 앞이라, 한 주간 못 봤던 목련을 실컷 보았다. 단골 밥집은 여느 주말처럼 사람이 북적여 한참의 웨이팅 이후에 들어갔더니 너무도 출출했다. 메인디쉬보다 함께 주문한 와인이 먼저 나와 물 대신 목을 축였다. 같이 간 친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 얼굴 엄청 빨개요!” 세상에나. 속이 비기도 했거니와, 오랜만의 알코올이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창피하면서도 좋았다.
그 순간,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서도 몇 사람을 더 만났었고, 심지어는 훨씬 더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는데, 올해 처음 본 수많은 목련과 봄날의 와인은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나 보다. 고백하자면,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난 이후 맞이한 그 어느 봄에도 그 친구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다. 특히 이렇게 목련꽃이 조금씩 떨어져 갈 때 즈음엔.
그 친구를 알고 지내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니 어쩜 보자마자부터,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무척 많이 좋아했다(고 내 감정에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좋아했다). 이전에 결혼을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으며, 어떠한 문제로 결혼을 하지 못한 이후 그 누구도 그만큼 사랑할 만한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해 왔었다. 하지만 그 친구를 만난 이후로 나의 그 확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좋았지만, 그 친구는 나를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그 어느 수학 문제보다도 어려운 것 같아 머리가 아프던 어느 날, 그가 페이스북에 댓글을 남겼다.
“여름씨, 우리 목련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는 꼭 만나요”
그 댓글을 보는 순간 예감했다. 안 그래도 특별한 그 친구와, 생에 다시없을 특별한 연애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목련꽃은 금방 다 떨어지니까, 그전에 네가 데이트 신청을 할 텐데,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어떤 답장이 조금 더 근사하거나 사랑스러워 보일까. 그 이후에 내게 존재한 모든 순간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정말이지 그 며칠 동안 그렇게나 열심히 하고 재미있어하던 회사 일조차 손에 하나도 잡히지 않았고, 온 신경이 휴대폰으로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그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름씨 많이 바쁘시죠? 그래도 저 만날 시간 좀 내어주세요"
"맞아요 저 진짜 바쁜데...라고 말해야 하는데. 저 시간 많아요, 당신 만날 시간은요!"
그 당시 어느 드라마에 나오던 주인공의 대사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마음먹었다 유치하게도. 이미 예고되어 있던 데이트 신청인데도 그렇게나 기뻐서, 기쁜 마음이 숨겨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 만나서 초밥을 먹고, 합정의 어느 거리를 가만가만히 걸었다. 손도 잡지 않았지만 손잡은 것보다 더 떨리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목련꽃은 다행히 아직 다 지기 전이었던 봄밤. 그 봄밤의 공기마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의 단골집이라며 한눈에 보기에도 분위기 있어 보이는 와인바로 데려갔다. 사장님은 그 친구를 알아보고 메뉴판에 없는 메뉴들을 만들어 주기도 하셨다. 우리는 와인을 함께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 순간순간 그 친구와 이렇게나 속 깊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둘이 와인을 두 병쯤 마셨을까.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해서 많이 취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친구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일 무렵 그 친구가 배시시 풀어진 표정으로 자꾸 날 보고 웃고 있었다.
“여름씨 너무 귀여워요”
술기운에도 알아차렸다. 뭔가 놀리는 것만 같은데 뭐지? 이에 고춧가루가 낀 건 아닌가. 그런 안주를 먹은 게 없잖아! (치즈와 샐러드, 고기 이런 것들만 먹은 것 같은데!) 확인을 위해 잠시 화장실로 간 나는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와인 덕분에 입술 안쪽만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오늘 되게 신경 쓰고 나왔는데. 아까까진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 어쩌지. 얼굴이 너무 못나 보였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술 마시고 얼굴 빨개지고 그러면 얼굴이 더 예쁘기만 하던데, 나는 왜 이래. 이 얼굴을 보고 웃지 않았다니, 심지어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날 놀리다니. 덕분에 어느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마음을.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 있게, 그리고 (그 친구 입장에서는 무척) 뜬금없이 말했다.
"근데 우리 오늘 왜 만난 거예요? 저는 당신이 좋아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거예요"
그러자 잠깐 어이없는 표정이 스쳐 지나간 그 친구가 정신을 차리고 결심한 듯이 말했다.
"여름씨, 제가 더 많이 좋아해요"
가수 장범준의 연금이라는 <벚꽃엔딩>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그러하였는지, 흔히들 ‘봄’하면 ‘벚꽃’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내게는, 적어도 그 친구를 만난 이후의 내게는 봄이 곧 목련이다. 아주 잠시 피고, 이내 만발하는 벚꽃에 잊히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떨어진 것만 같은 커다랗고 새하얀 꽃잎.
우리는 결국 해피엔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우리를 잊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 친구가 내게 돌아오길 바라지도, 내가 그 친구에게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때의 우리는 너무 예쁘니까. 이 계절이 돌아오고 목련꽃이 피고 질 때마다 꺼내어볼 수 있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왓코에 갔던 기억이 좋아, 다음 주에 다른 친구와 다시 그곳에 들렀다. 역시나 목련은 빨리 피고 지는 꽃이라 어느새 꽃이 다 떨어지고 심지어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그 새싹마저 새로운 꽃 같고 예뻤다. 목련나무는 어쩜 이럴까. 처음 피어난 꽃도, 꽃이 지고 다시 피어난 새싹마저도 예쁘다니. 우리의 사랑도 목련꽃과 함께 지고 말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싹처럼 새로운 사랑으로 각자에게서 또다시 탄생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