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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ul 08. 2020

우리에겐 겸손할 권리가 없다

20대 초반에도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동네를 지나는데 리트리버가 갑자기 내게 뛰어와 안겼다. 어이쿠! 육중한 무게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좋았다. 생김새도 느낌도 전혀 다르지만 세상 모든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난 여전히 우리 동동이(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를 생각한다. 아직은 호기심 많은 애기인 것 같은 리트리버는 노랑 머리띠도 하고 있고 예쁜 가방도 메고 있었다. 옆의 친구분께 이름이 뭔지 물었다. '잼'이라고 했다. 어쩜. 이름마저 너무 귀엽잖아! 덕분에 동동이와의 즐거웠던 산책을 추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도 통화하며 이 상황을 나눴다. 별 일 아니지만 내게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잼이 빵순이 하나 씨를 바로 알아봤네요"라며 웃더니 "강아지들도 미인을 알아본대요"라고 말한다. 가장 나이 들고 아프고 예쁘지 않은, 꼭 강아지가 털갈이할 때 같은 이런 시절의 나를 이렇게 예뻐해 주다니. 잼과 빵순이의 연결이 왠지 귀여워서 웃다가 어느새 눈물이 났다. 어서 다시 체력을 회복해서 건강하고 생기 있는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 뒤엔 또 하고픈 일들이 무척이나 많다.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이 친절히 알려 준 5년 전 어느 날의 내 모습. 지금보다 5년이나 젊었고, 훨씬 건강했는데(다만, 저때 메르스도 아닌데 정체불명의 마른기침이 좀 오래가서 기관지가 무척 약해졌다.) '털갈이하는 강아지'에 나 자신을 비유하며 못난이같이 여겼다니. 내가 예쁘니까 애인도 나를 예뻐했을 뿐인데, 몸도 마음도 약해져서 나를 예뻐하는 애인에게 저토록 고마워하기까지 했다니. 5년 전의 나에게 돌아간다면 얘기해주고 싶다.


"여름아,  충분히 젊고 밝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야!"


암튼 자존감이 꽤나 높은 나도 저런 순간이 있다. 그런데 주변의 (특히) 여성들을 보면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내리는 경우가 무척 많다. 난 뚱뚱해 살 더 빼야 해, 나 안 어려 내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예쁘다니 세상에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별로야 좋은 사람 되려면 멀었어, 내가 일을 잘하기는 다들 그 정도 하지 등등...


얼마 전에,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김하나 작가님께서 "우리에겐 겸손할 권리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성들이 충분히 일도 잘하고 업무 성과를 잘 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축하의 말들을 건네면  다들 이 정도는 한다며 겸손해한다고. 겸손한 척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마저도 본인의 성과에 대해 플랫하게 여겨버리면, 조직 내부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이행되는 '성과 이상의 평가'는 물론이요, '성과 그대로의 평가'조차도 이뤄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조차도 지난 십수 년의 조직생활에서 그래 왔다. 거의 나 혼자 고생하고 이뤄낸 결과물에 대한 조직의 보상(인센티브나 특진 등) 하나 없이 "하나 팀장 너무 수고 많았어"라는 말만 들어도, '수고 알아주는 마음 하나면 됐지 뭐' 라던가 '나 혼자 너무 고생한 티 내며 저런 인사받으면, 이번 프로젝트에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함께한 사람들이 서운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 잘난 티 한 번을 제대로 못 냈다. 쓸데없이 막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쓸데없이 깊은 겸손함까지 갖췄던 것이다. 그래서 김하나 작가님의 "우리에겐 겸손할 권리가 없다"는 얘기에 너무도 격한 공감을 하고, 한동한 카톡 상태 메시지로 해두기도 했다. 자주 보면서 자꾸 겸손해지려는 순간의 나에게 주문처럼 닿기를 바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우리 독서모임에서는 이런 얘기도 나눴었다. 한 멤버가 " '아싸'를 요즘 친구들 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우리는 모두 '아웃사이더'를 뜻하는, '인싸'의 반대말인 '아싸'인 줄 알고 "아싸도 요즘 언어인데, 이십 대는 그걸 또 다른 말로 부른다고요?"라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아싸'가 아니라 감탄사 '앗싸~~!!'였다. 앗싸는 요즘 "헐 대박" 정도로 쓰이지 않나 했는데, 이 질문을 했던 멤버의 팀에 대학교 4학년쯤 되는 인턴이 "저도 나이 들어서 어린 친구들 언어 잘 몰라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적이라 해도, 20대 초반에도 자신을 '나이 들었다'라고 느끼다니.


우리는 진짜 나이가 든 어느 순간이 아니라, 한창의 성장기를 거친 후 20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거의 매년 '나이 들었다'라고 느낀다. 젊디 젊은 29살에도 이제 곧 서른이라며 서른이 되면 큰일 날 것처럼, 30대에는 20대가 젊은 거라 규정지으며, 40대가 되면 진짜 큰일나게 늙고 빼도 박도 못하게 중년이라도 되는 듯이, 심지어 20대 초반에도 갓 스무 살들보다는 늙었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그리고 모든 이들의 젊은 날이 안타까웠다. 젊은 날을 오롯이 그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고픈 얘기와 이런 현상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더 길게 늘어놓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하고. "우리 자신을, 지금 현재를, (너무한가 싶을 만큼) 긍정하자" 그 정도 애티튜드는 가져야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주어진 그대로 누리며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자신을,
지금 현재를,
(너무한가 싶을 만큼)
긍정하자.

충분히 그래도 된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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