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니> 환불원정대 프로젝트 마지막 편을 보다가 눈물이 찔끔 난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마련된 그들의 무대. 함성은 들리지만 눈에 보이는 관객은 없다. 코로나 시대임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 국내에 코로나 첫 환자가 발생한 지 10개월. 아직 채 1년이 안되었을진대 이렇게나 뼈속 깊이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들어, 마스크 없이 일상을 누리고 공연이나 야외 페스티벌이나 여행을 자유롭게 간 게 수년 전 같이 느껴진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엄정화는 "나 정말 행복했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를 포함한 대중들도 이번에 엄정화를 보면서 많이 뭉클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긴 시간들 속에서 그가 투병생활을 하고 다시 가수로 돌아오기 위해 쉼 없는 노력과 좌절을 했던 모습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많이 갔다. 그리고 동년배는 아니고 한참 선배지만, (비혼이든 아니든) 싱글로 살아가고 있는/사회생활 오래 한/(아픈 적이 있든 아니든) 물리적 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강에 크게 신경 쓰는/여성이라는 점도.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가 서로를 북돋우며 환불원정대 프로젝트를 멋있게 마무리하는 모습은 참 뭉클하면서도 멋있었고, 나의 세계에서도 (여러 조건들로 인해 참 쉽지 않지만) 저런 모습들을 이뤄내고 싶어 졌다.
여성들의 연대가 주를 이루는 서사를 보고 있자면 여전히 마음이 애틋해지고 만다. 환불원정대도 그렇고 <미쓰백>을 보면서도 그랬다. 점점 구성은 평범해지고 더 괜찮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남지만, 기획의도만은 너무도 좋은 미쓰백의 첫 회를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 애인과 함께 첫 회를 다시 보면서도 울었다. 여전히 여성의 성 착취를 기본 삼아 굴러가는 듯한 엔터산업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나도 그 세계에 오래 있을 때는 지금보다 어렸고 여려서, 잘못됐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요즘보다 적기도 했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자칫 "여자라 감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봐 내 감정을 숨긴 채 또는 무디게 만들어 털털한 척하며 넘어가 버릴 때가 많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도 모르고 당황하다가 제대로 화를 못 내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도 했다.
몇 년 전 라이징 스타였던 한 남배우는 모든 마케팅 홍보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해줬다. 배우가 그렇게나 협조적으로 임해주는 경우가 희박하므로, 그리고 그가 나서주면 관객들의 반응도 굉장히 좋았으므로, 난 담당자로서 프로모션 기간 내내 그가 참 고마웠었다. 그런데 마지막 회식 날, 그는 내 앞으로 오더니 내 가슴에 관련된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난 너무 당황했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그의 매니저에게 그를 제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나마도 그의 매니저가 여성이었기에 나의 이런 요구를 바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같았다면 화를 참지 않고 다른 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바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 엎어버리고 끝낼 만큼 그를 말로 짓이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지금보다 너무 여렸다.
그리고 그는 맥주집에서 취해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1차 사건이 있어서였는지 크게 놀라지도 않고(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이 변화되었다는 얘기다. 화가 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바로 매니저에게 알려주고 자리를 급히 마무리했다. 다음날 그의 매니저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다시 받았다. 당사자인 그에게서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난 그저 피해자였을 뿐이었는데도 수치심은 내 몫이었다. 대체 왜. 그런 얘기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회자된 것 자체도, 공론화시키면 이런 이야기를 더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얘기해야만 하는 것, 대체 어떻게 업무를 하는 동안 나를 총괄 담당자가 아니라 그저 여성으로 인식해왔던 것인지...그 남배우의 입장을 확인하는 그 순간 밀려드는 자괴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그저 싫었다. 내가 남성이었다면 그 남배우는 내게 잘 보이려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나로 인해 이후 다른 작품들 캐스팅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내가 있던 회사는 그 당시 많은 작품들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고,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각 담당자들은 각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를 추천했다. 한 번 같이 작품을 해 본, 좋은 경험을 남긴 배우가 어느 시나리오의 어느 캐릭터에 잘 어울릴 것 같다면 주저 없이 강력 추천했을 테니까(그게 여러 번이더라도). 하지만 그 남배우에게,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업무적인 파트너가 아니라 그저 '여자'이기만 했던 것이다.
내 후배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게, 또는 겪더라도 내가 더 방어를 해서 그들이 화살을 피해자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이후에 비슷한 상황들을 맞닥뜨렸을 때 나름대로는 애쓰고 있다. 이런 상황들이 아예 없는 것이 가장 좋은데, 여전히 비슷한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이럴 때마다 여성들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전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이, (큰 에너지를 들여 고소를 진행하고 이런 일들은 엄청난 용기와 결심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왜 그저 일상을 유지하고 싶을 뿐인데 이렇게나 애쓰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여성들의 연대만으로 이런 일들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또다시 애틋한 마음을 끄집어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