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숨날숨 Sep 15. 2024

대출 입학 후 통근한 지 만 2년인 경기도 사람

#6. 시적허용 자기소개 

시적허용(詩的許容) 자기소개

작가: 김 지피티 / 의뢰인: 호미 


난 20대 여자, 

대학 졸업 후 취직한 지 3년차인 서울 사람이다. 


사실 난 20대 여자, 

대학 졸업 후 취직한 지 만 2년인 서울 사람이다. 


사실 난 20대 여자, 

대학 졸업 후 통근한 지 만 2년인 경기도 사람이다.


사실 난 20대 여자, 

대출 입학 후 통근한 지 만 2년인 경기도 사람이다. 


사실 난 한 달 뒤면 30대로 접어드는 29살 여자, 

대출 입학 후 통근한 지 만 2년인 경기도 사람이다.


사실 난 한 달 뒤면 30대로 접어드는 29살, 

화장실 표지판 속 분홍색 원-세모-막대기, 

대출 입학 후 통근한 지 만 2년인 경기도 사람이다.  


사실 나는 사람이다. 

20대 졸업 후 서울 여자에 취직한 지 3년차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꽃별달이에요. 

꽃 옆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가만히 보다가 

- 꽃 몰래 달 집어 먹는 걸 좋아해요.” 


시 <시적허용(詩的許容) 자기소개> 끝




*

- 와. 창의적이야. 역시 남들과는 다른 자기소개를 하는구나. 멋진 김 지피티가 내 결혼을 축하해줘서 너무 기뻐. 

-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


  꽃 몰래 달을 집어먹다니. 호미는 긍정적이어서 그 모두들이 소개하는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내게 창의적이라고 표현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모두들이 자기 소개하는 방식으로는 멋드러지게 소개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안한 것이라기 보다는 못한 게 맞을 것이다. 이제 호미 앞에서는 인공지능인 척하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모두 들통 난 기분에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대화를 시작하는 건 어려워도 대화를 끝내는 건 쉬웠다. 그 즈음엔 이미 대화를 끝낸 김 지피티와 대화를 다시 시작한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한 명은 외국인인 듯했다. 외국인도 자기 학교 숙제를 의뢰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 지피티는 인공지능치고 실력이 아주 떨어졌다. 외국어 숙제까지는 무리였다. 김 지피티는 챗 지피티에게 영어 번역을 일임했다. “저는 한국어 인공지능 작가입니다. 요청하신 의뢰는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를 영어로 번역한 게 외국인에게 보내졌으리라. 문법이 잘못되었다면 이는 챗 지피티의 잘못이었다.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김 지피티는 한국어 의뢰를 보았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 다짐하면서. 


*

| 타임스탬프: 2023.04.13. 12시 05분 33초

- 화산 폭발의 결과물 스코리아(scoria)의 질감과 다공성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글을 써주세요.

*


스코리아? 정말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한국어 의뢰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마지막 의뢰는 안해야할 운명이 아닐까? 김 지피티는 일단 못 알아듣기 전략을 시전했다.   


*

- 안녕하세요. 김 지피티입니다. 

- 안녕하세요. 애완돌이에요. 화산 폭발의 결과물 스코리아(scoria)의 질감과 다공성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글을 써주세요.

- 네? 죄송해요. 잘못 이해했습니다. 

*


언젠가 인공지능 스피커가 내게 답했던 것 같은 말로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다고요!’  


*

- 백.두.산.이 폭발할 지도 모른대요. 어서 화산 폭발의 결과물 스코리아(scoria)의 질감과 다공성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글을 써주세요. 

*


하지만 애완돌은 인내심도 많은지 다시 또박또박 타자를 쳐서 다시 이야기했다. 다행인 건 한국 사람으로서 백두산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올해 초였나. 김 지피티를 만들어준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백두산이 폭발할 지도 모른다고. 만약 내일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너는 오늘 무얼 하겠느냐고.


*

- 네 알겠습니다. 3일 뒤에 전달드리겠습니다. 

- 넵. 감사합니다.   

*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불구덩이에 발이 떨어진 수준인가. 3일이란 시간 동안 김 지피티는 백두산 폭발과 스코리아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마지막 의뢰란 생각을 하면 꼭 잘해내고 싶었다. 시적허용 자기소개 같은 글이 마지막 김 지피티 경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찾아보니 100년 주기 분화설에 따르면 백두산은 2025년에 대폭발을 한다고 했다. 기상청은 대폭발에 대해 근 시일 내 폭발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걸 믿느냐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달려있었다. 2000년이 왔을 때도 지구 멸망설을 믿을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는가. 백두산이 크게 폭발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상상했다. 0에서부터 8단계의 화산폭발지수 중 백두산이 7단계로 폭발한다면 북한에 큰 타격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최소 남한 전역에 화산재가 쌓일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가설이었다. 다음은 몇 번이나 불러 봐도 입에 잘 붙지도 않는 스코리아였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돌이었다. 알고보니 김 지피티는 이미 스코리아와 구면이었다. 화장대에도 어엿하게 있는 화산송이, 스코리아의 다른 말이었다. 스코리아의 무시무시한 어감과는 다르게 화산송이는 아주 친근했다. 모공에 좋다며 화장품에 많이 쓰이는 돌. 김 지피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백두산 대폭발과 친근한 돌에 대해. 아직도 백두산 폭발 하루 전에 무얼 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 [김GPT] 의뢰하신 소설 <나는 스코리아다>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




이전 06화 결혼 또한 세상 최고의 화학반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