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름소설
영희.
야행성 올빼미가 낮에 유혹당할 확률과 영희가 여행갈 확률은 같았다. 아홉수여서일까, 홀로 집에만 있던 영희가 훌쩍 몸을 실었다.
경빈.
가란다고 진짜 가냐. 고비사막의 가을밤은 춥디추웠다. 간밤에 감기가 들었는지 경빈은 내내 재채기를 달고 있었다. 개봉 직전의 강박에서 벗어난 건 감기의 장점이었다. 갑부의 감방 탈출 액션 영화를 뒤로 하고 오르내리는 체온. “빈. 괜찮아?”
게르에서 경빈을 간호하던 유목민의 얼굴이 들어왔다.
민정.
정말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뭐든 맞다고 하는 그의 말이 좋을 때가 있었지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주는 그도 좋을 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 모든 게 싫었다.
민정이 문자로 헤어짐을 고했을 때,
누군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지혜.
-쟤가 누구더라.
-지혜야. 좋아해.
-저희 잘 만나보겠습니다.
지칭으로 우리는 관계의
어느 단계에 왔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역순도 가능하다.
민주.
나의 민주에게.
민주 안녕? 지난주 우린 갓 나온 만쥬를 호호 불면서 먹고, 이번 주엔 싸락눈을 맞으면서 겨울을 잔뜩 만졌어. 설령, 겨울이 녹아내린대도 걱정 마.
봄을 만져대면
새싹이 마중나올테니, 마음껏.
희경.
히행헤호후핳! 단 하나뿐인 희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혐기성 인간은 힐긋 보며 호구 같다고 희화화했다. 대뜸 코 베어간다며 겁박하고 화도 냈다. 그럼에도 흘러 흘러가니, 호기성 인간은 그 웃음소리를 듣겠다고 해협을 훠이 건너오기도 했고. 다 헹궈냈는지 허공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광현.
공항을 한참 맴돌았다. “당신은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어요.” 라는 항공권 사이트가 무색하게, 광현이 가고자 하는 곳은 비행기로도, 차로도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갰다. 광현은 공항을 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배로 두둥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고 있었다. 백령도였다.
가영호진.
호진은 문득 생각했다.
어쩜 초성도 ㄱㅇ이지? 귀여워.
가영을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면 판타지,
해질녘 공원을 같이 걸으면 로맨스,
호젓한 밤 또 먹을 궁리에 코미디까지,
그 어떤 장면도 영화 같을테지.
곽유화.
아흔 살이 된 유화 씨의 생일잔치다. 어렸을 적 숫자를 열까지만 세도 엄청 크다고 생각한 건 유화 씨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주름살이 미울 때도 있었다. 다행인 건 유화는 지우긴 어렵지만, 덧칠하면 더 볼만해졌다는 것이다. 아흔 번 덧칠이 된 종이에 여한은 없었다.
동훈.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지. 또 먹으면 배탈나. 딩동댕동.
척척박사님. 알아맞혀보세요.”
대학생 동훈이는 척척박사님을 찾고 있었다. 저녁에는 뭘 먹을지, 내일은 뭘 할지. 몇 년 뒤 대학원생 동훈이도 발을 동동거리며 척척박사님을 찾고 있었다.
인철.
이체와 인출 버튼 사이 머뭇거리던 인철은 전액 인출을 택했다. 일 원만 빼고. 삼년 간 예치해둔 금액이 나왔고, 지폐 한 장 한 장을 만졌다. 까끌거리면서도 미끈한 느낌. 오래 전부터 친했던 친구가 도와달라니…는 무슨. 다시 이체 버튼을 눌러 일 원을 계좌이체했다. 메모에는 ‘보이스피싱ㅗ’라고 적혀있었다.
예일.
예일대에 합격한 예일을 보면서 누군가는 이름값을 믿었다.
입학 이유라든가, 어려움이라든가는 감탄사 “와우!”로 통일되었고
예일은 어느새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이름이 오이였다면 달랐을까.
시크릿라떼.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주문하는 심리는 가게 사장님과의 친밀감, 예상을 살짝 벗어나고픈 설렘,
“주문하신 라떼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에 대한 떨림. 라떼 속 나비가 창밖으로 날아갔다.
유정.
세상 모든 유정이에게 미안하다. 실은 내가 유정낙지 딸이다. 어릴 적 으레 듣던 이름 놀림-유정낙지~는 내게만 진실이었다. 연좌제 삼아 놀림 받은 유정이들, 정말 미안해. 지역 유지이자, 모두 아는 식당 딸이지만, 평생 숨겨보려 해.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제도 우리 집에 데려갔다. 그래도 맛은 있었잖아.
하은.
화랑에서 할인을 요구했다.
“선생님 행여나...괜찮으시죠?” 화가 박하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예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돈에 혈안인 어른들이 만든 학예회 그뿐. 해안도로를 달리는 차 안, 그림 두 점이 들어있었다. 화랑으로 혹은 파랑으로, 혹은 그 모두에게로 달려갔다.
주수빈.
수빈은 남은 주를 세지 않고, 지난 주를 세고 있었다. 수백 일이 남은 어떤 날을 그저 기다리기엔 너무 아득하고, 남은 일을 세기엔 너무 간절해졌다.
지난 주를 세면 위안이 되었고.
수빈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지연.
전지훈련을 하던 지연은 이 상황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재연배우로서 잠시 운동하는 척 연기한 장면을 보고 재능이 있다며 국가대표로 발탁한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비인기 종목이라 해도 말이다.
준호.
장화를 신은 할머니가 진흙탕을 저벅거렸다. 주변의 잡다한 공구, 끊긴 전화선.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려왔다. 준호의 목소리였다.
민기.
문구점 사장 민기에겐 고민이 있었다. 저출산, 학용품 무상공급, 다이소의 등장으로 인한 매출 감소? 음. 생존위협이었지, 고민은 아니었다. 며칠 전 찾아온 아이가 뭉게구름 속 무지개를 찾았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무지개를 분명 딱 한 번 느꼈다고. 다시 느끼고 싶다고. 문구점 사장님으로서 몽글몽글한 뭉게구름과 꽃이 만개한 듯한 무지개를 다시 찾아줘야 했다.
성아.
서울은 상이자, 성이었다.
상경한 성아에게 포상이 내려졌다.
‘문이 가득한 으리으리한 성에 살거라.’ 다만, 문에 온통 당기시오가 쓰여있었다. 쉴 새 없이 당겼고, 문은 쉴 새 없이 나왔다. 문득 성을 나가고 싶었다. 설익은 엇박의 산울림을 타고 문을 밀었다. 어느새 밖이었다.
용욱.
여우는 용이 되고 싶었다. “동굴 속에서 백 일 간 우엉만 먹으면 용이 된단다.” 여우는 동굴에 들어갔다. 근데 좀 심심했다.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고자 우엉을 말리기도 하고, 염장도 했다. 여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구십 구일에 동굴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용우김밥’을 차렸다. 오늘날 대박난 용욱김밥의 시초다.
뮌.
뭔 소리야?
뮌이라고.
뭔 소리냐고.
ㅁ ㅟ ㄴ 소리낼 수 있잖아. 뮌.
수만.
서명운동에 적혀있던 성명 세 글자 - 박수만,
선민의식인지 서민의식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림.
하루가 홀연히 사라졌다. 365일 중 딱 1일이 없어진다고 무슨 일이 있겠냐고 했지만 흙에서부터 하늘까지 혼란스러웠다. 그 하루는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자, 피하고 싶던 시간이자, 한평생 기다려온 날이었다. 흐름이 끊긴 가운데, 화림만이 홀로 기억하고 있었다.
배상윤.
-배랑 사과는 함께할 수 없어 상윤아.
사과가 숨쉴 때마다 내뿜는 에틸렌은
치명적이야. 곧 무르고 상하고 말 거야.
-그럼 상에 배랑 사과를 같이 올리지 말았어야죠. 그거 아세요?
에틸렌은 한 번 생성되면 스스로 합성을 촉진해요.
이미... 시작됐어요.
베루카.
즐기는 자가 곧 무지크!
독일 3대 음악가 바흐-베토벤-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민정은 밴드 동아리 베루카를 선택했다.
독일에서 온 무지크 정신으로 합주를 즐긴 뒤 부딪치는 맥주 막잔 캬아! 찐막이라고 뭉개며 줄을 어뤄만지면!
음을 모조리 다 틀린대도 그게 무지크!
바흐-베토벤-베루카-브람스!
혜현.
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줄의 진동은 꽉 닫힌 혜현의 헤드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팽팽해진 호흡을 켜고, 튕기고, 문지르고 뜯어 온 몸통을 증폭시켰고, 무대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