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제약회사 직장인 성장기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다.
엑셀, 파워포인트는 익숙해도 아웃룩은 처음이었다.
영업소에 배치를 받고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열심히 구워간 쿠키로 환심을 사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하며 신입사원의 패기를 온 마음 다해 보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업무적으로 극복해고 싶었다.
정말 간단한 업무였다.
사내 제품 샘플을 신청해서 샘플을 요청한 고객에게 가져다 주면 되는 일이었는데
아무리 사내 시스템을 뒤져도 샘플을 어떻게 신청하는지를 못 찾겠더라.
겨우 찾았지만 아직 시스템 내부적으로 나에게 권한이 부여되지 않아 샘플 신청이 불가능했다.
빠른 시일 내에 샘플을 받아 가져다 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담당이라고 짐작되는 '유통팀'의 누군가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사내 시스템 화면을 캡쳐한 이미지와 함께
'해당 시스템을 통해 샘플을 신청하고자 하는데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아웃룩에 내가 기재한 이메일을 받는 사람이었다.
정확한 담당자를 모르니, 담당자의 이메일을 적는 대신,
그냥 막연하게 받는사람 칸에 보이는 '주소록'을 눌러
Global XX > Asia XX> Korea XX > 유통부 > 유통팀> 아무개씨 순으로 클릭해 나갔다.
나는 그럼 그냥 '유통팀의 아무개씨' 한 사람에게만 메일이 가는 줄 알았다.
내가 눌렀던 모든 group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Global XX로 시작했으니 전세계 회사 사람들에게 메일이 갔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저녁 8시에 메일을 썼고, 전화를 받은 시점은 8시 40분경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인사팀 과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메일을 회수해야겠다.'
내가 보낸 메일이 3만명의 전세계 XX 회사 근로자들에게 발신되었고,
해당 내용이 업무와 관련 된 매우 긴급한 내용인 줄 알고 타 지사에서 한국 지사로 상당한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아웃룩에서 회수를 해 본 적이 있을리 없었다.
10여분을 씨름하다가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뭐 하고 있니? 회수는 다 됐니? '
'아.. 그게 회수 버튼을 누르긴 했는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에게 발송되었고 이미 읽은 사람한테는 회수를 할 수 없고.. ' (나는 떨고 있었다. 갑자기 입사 계약서에 기재 되어있던 '수습기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3개월 이내에 회사에 막중한 피해를 입히거나 어쩌고 저쩌고 하면 입사가 취소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저지른 실수가 혹시 막중한 피해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냥 잘못 보낸거라는 해명 메일을 다시 전 세계에 보내는게 나을 것 같아.
전무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네 그럼 빨리 작성해서 보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메일을 시작해야 할 지 난감했다.
본문 내용이야 대충
'아웃룩 사용이 미숙해서, 실수로 전 세계 직원들에게 보내게 되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되며, 방해해서 미안하다 '라는 내용이면 됐고,
문제는 시작 부분이었다.
밤9시가 다 되어간 시점에, 이 메일을 보고 한국 지사로 전화를 했다는 얘기를 생각해보니
미국이든 유럽이든 어딘가는 한국과의 시차로 한참 일 하고 있을 시간이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전 세계 직원들에게 올리는 인사로 메일을 시작했다.
" Good morning, Good afternoon and Good evening... "
새로 입사하게 된 직원이라는 나의 소개와 함께 실수였고 미안하다는 사과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마 저 비슷한 문구가 트루먼 쇼라는 유명한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 영화를 보긴 봤었는데, 특별히 그 장면이 인상 깊었던 건 아닌데
나의 무의식에 깊이 박혔나보다.
글을 써서 보낼 당시 난 그것도 모르고 썼는데, 내 메일을 받아본 외국 지사 사람들 중에
이 말을 굉장히 위트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습 메일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음날은 전사 직원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회계연도를 시작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다.
엄청난 실수로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