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제약회사 직장인 일대기
11년 전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의료기기 영업사원이 전문의를 대신해서
수술을 집도 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연일 보도 되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뉴스를 본 기억이 있는데 의료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어디나 폐단은 깨끗이 도려내기 힘든 가보다.
각설하고,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뉴스를 보면서 나는
영업을 하며 겪은 다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상대편이 보이는 행동, 몸짓, 상대방의 생각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을 그렇게 행동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을 파악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왜 이 사람이 이럴 수 밖에 없는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어쩌면 사람을 싫어하고 싶지 않은 그냥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 된
나의 버릇 같은 거다.
영업부에 있으면서 내가 루틴하게 만났던 사람은 약 30명 남짓 되었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많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도 있었다.
처음 울었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신입 사원으로 모 대학병원의 어떤 과장을 처음 보는 자리였다.
대학병원에서는 의사가 원한다고 본인이 원하는 약을 다 쓸 수 있지 않다.
병원 내부의 drug committee를 통과한 소수의 약들만이 code in 되고
그 code in 된 약들만 처방 될 수 있다.
따라서, drug committee의 위원들과, 해당 약을 drug committee에 올려 주는 역할을 하는
각 과의 과장은 약물 권한에 있어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수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나에게 인계를 해 준 선배는 특정 과를 방문할 때
과장은 찾아보지 않고 본인의 약물을 써주는 교수만 찾아뵈었는데,
해당 약물의 다른 용량을 code in 하는 과정에서 과장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필이면 그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시점에 내가 그 업무를 이어 받게 되었다.
문제는 나는 이미 과장과 이야기가 다 완료 되었고 서류에 싸인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정작 해당 과의 과장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새로 바뀐 담당자라고 인사하고 진행하고 있는 약물 코드와 관련하여 서명을 부탁드린다고 했는데
벼락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본인은 우리 회사를 알지도, 이 약을 알지도 못하며 담당자는 처음 본다며 화를 낸다.
당황했다.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보다는 그 사람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전공의들의 눈초리였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그 사람은 회사를 대표해서 본인을 찾아 온 나에게 회를 낼 수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며 나를 다독였다.
히자만 그 과장 너머로 나를 보며 서 있는 이 일과는 무관한 전공의들의 눈 빛이 따가웠다.
종종 있는 일일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할까?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는 말을 뒤로 하고 방 문을 열고 나오는 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여자 화장실을 찾아 눈물을 닦고 나오는데 아까 그 진료실 안에 있던 전공의와 맞닥뜨린다.
분명 내가 울었다는걸 알거다.
'젠장....'
계속 봐야 하는데 나는 누군가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게 싫다.
병원 내 편의점을 찾아 목을 축일 물을 찾는데 진열대에 있는 팩소주가 시선을 잡아 끈다.
술도 못 하는 내가 처음으로 팩 소주를 이럴 때 먹는거구나 하며
사업이 망한 이후에 술을 즐겨 찾으셨다는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냉수를 마시니 정신이 조금 든다.
좀 전의 상황을 소장님께 보고 하는데 마음 한 켠에서 나를 위로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저 사람 잘못한게 없는 나에게 화를 냈으니, 다음에 찾아가면
미안해서라도 내 얘기를 들어줄거야 '.
나는 회복 탄력성이 뛰어난 것 같다.
상처에 취약하기도 했지만 내가 넘어졌는지도 모르고 금방 털고 일어나는 힘이 있었나보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갔다. 어제 울고 간 신입사원이 오늘 또 오다니 간호사를 비롯한 전공의들이 놀란 눈치다.
먼저 말을 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