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우주 Aug 02. 2022

<집사의 일기5>이제 병원은 안 가기로 했어요

13 Ⅰ.슬픔에 대하여 ⑫

제가 맘에 뒀던 아이 깜숙이네 집사님, 통통숙이네님이 전에 올리신 글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봤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실까 참 아득했는데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저도 이제 더는 병원을 가지 않기로 했어요.

어제 글 올릴 때까지만 해도 파이팅이 넘쳤거든요.

이틀 연속 복수 천자하고, 12시간 간격으로 내원해 항생제 주사 맞히면서

이게 아이를 위한 처치이고, 아이는 힘을 내줄 거라 저를 다독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부터 아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제 천자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제 다녀와서는 내내 정말 힘들어했습니다.

두려움 가득한 텅 빈 눈을 보면서, 이제 몇 걸음 내딛기도 힘들어하는 앙상한 다리를 보면서

이게 다 내 욕심이구나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곁에 두겠다면서 아이를 항생제에 찌들게 하고, 매일 무서운 주사기에 찔리도록 했구나.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싫다고 하는데 나는 내 욕심만 부렸구나...

그제 400ml, 어제 300ml 천자했는데 저녁 되니 금세 배는 차올랐습니다.


밤을 하얗게 보내고 오늘 오전 예약한 검진 시간엔 저만 혼자 내원해 주치의와 상담을 하고 왔습니다.

주치의는 기대수명이 1~2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처치와 투약을 중단하겠다는 저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잘 결정했다고 아이와 많이 시간을 보내라고 했어요.


저는 이제 아이의 편안한 시간을 위해 모든 걸 다 하려고 합니다.

사실 그래요. 저는 지금도 더 할 수 있고, 더 더 더 할 수 있어요.

하루 두 번 아니라 세 번, 네 번, 열 번도 병원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옆에 두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이가 원하는 게 아닌 걸 이제 알겠습니다.

아이가 없을 절망이 두려워 희망이라는 말로 아이를 너무 괴롭혔어요 제가...


저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우주 최고 예쁜이와 매일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시간이 펼쳐질지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고 아이에게 감사해요.


무엇보다 아이가 한결 편안해합니다.

아프기 전부터 저희 아이 몇 년간 루틴이 아침에 엄마표 요거트 한 숟갈 먹는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스스로 입을 대 몇 번 핥아주었어요.

턱 밑에 다 묻혔지만 너무 사랑스럽고요ㅎㅎㅎ


그리고 우리 앞으로 매일매일 맛있는 거 원 없이 다 먹자 모드로

좋아하는 것들만 엄선해서 오늘 식단(의 절반)+간식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오전엔 신선한 닭 후딱 잡아서 일주일치 생식을 만들었습니다.


신부전 레시피 뭐 그런 것 아니구요.

저희 아이가 지난 10년간 먹던 생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만 제한한 닭고기 생식입니다.

집에서 생식 만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갓 만든 생식 정말 정말 좋아하거든요.

바로 만든 생식에 오메가3 하나 짜서 주었더니 너무 잘 먹었어요.

오늘 합계로 무려 77g이나 먹었습니다!(물론 세 번에 나눠서지만ㅎㅎ)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걸 제가 해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고 벅찹니다.

이 기쁨이 오래 지속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매일 후회 없이 기뻐하려고요.


그럼 아픈 아이 돌보시는 집사님들 모두 새로운 한 주 힘차게 시작하세요!

다들 내 발 냄새 맡고 은혜 받으라옹!

2019.7.22.


이전 09화 <집사의 일기2>만성질환을 앓는 반려동물을 돌본다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