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직장 동료 두 명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셋 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만나기가 수월하다. 한 동료는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다른 동료는 우리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려 아직 현역이다. 한 학기 더 다니면 내년 3월부터우리은퇴자 대열에 합류한다.
식사 후 커피숍에 갔다. "커피 먹을래요? 아니면 허브차?" 현역인동료가 물었다.
"커피 먹을래요?"를 들으니 미국 동부볼티모어에 사는 흑인 여학생 B가 생각났다. 한국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병원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 직장은 옮겼어도 새해에 옛 동료들과 함께 한국인 사장님 댁에 가서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도 받는다고 한다. B는 따뜻한한국인 동료들과 한국말로 대화하고싶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어에서는 커피나 물을 마시기도 하지만 먹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더니, "저는 커피 안 먹어요."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영어로커피는 eat 하지 않고 drink 해요." '커피 먹는다'라는 표현이 재미있다며 커피를 아작아작 씹는 흉내를 냈다.
한국어의 '먹다'와 영어의 'eat'는 100% 일치하는 대응어가 아니다. 물론 공통적인 의미가 있지만, 둘의 쓰임새가많이 다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열거된 한국어 '먹다'의 15개 항목 중 제일 처음에 나와 있는 음식과 관련된 정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롱맨사전>에서 영어 'eat'를 검색하였다. 14개 항목 중 음식 관련 의미가역시 첫 번째다.
두 개의 정의를 비교하면 한국어의 '먹다'가 영어의 'eat'보다 포괄적이다. 한국어 '먹다'는 씹는 과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는데 비해, 영어 'eat'는 씹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즉 한국어 '먹다'는 씹어야 하는 밥과 케이크는 물론, 마시는 술, 물, 커피 등 액체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삼키는 약에도 사용한다.
그렇지만 영어 'eat'는 씹는 음식에만 해당된다. 씹지 않는 술이나 물, 커피에 'eat'를 사용할 수 없다. 'drink'를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씹지 않는약도 'eat'를 쓰지 않고 'take'를 쓴다.
한국어로는 기체도 먹는다. 단독주택이 대세였던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연탄을 땠다. 연탄가스를 먹고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경우가 흔했다. 연탄가스를 먹고 죽는 사고도 심심찮게 신문에 실렸다. 물론 영어에서는 씹을 수 없는 가스는 'eat'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외에 마음도 먹고, 나이도 먹을 수 있다. 겁도 먹고 욕도 먹는다. 뇌물을 먹으며 이익도 먹는다.
영어 'eat'도 음식물이아닌 것들과 다양하게 어울린다. '말을 씹어 먹는다'(eat your words)는 앞서한 말을 취소한다는 의미다. 화가 나면 '산채로 누군가를 씹어먹는다'(eat somebody alive).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뜻으로 '모자를 씹어 먹겠다'(I'll eat my hat.)라고 말한다. '뭐가 너를 씹어 먹고 있지?'(What's eating you?) 하면 무슨 걱정이 있는지를 묻는 말이다.
한국어의 '먹다'와 영어는 eat는 같은 단어로 인식하고 있지만, 씹는 음식을 먹을 때를 제하고는 이렇게 쓰임새가 각기 다르다.
아직 초급인 B의 한국어 수준이 높아져 음식물이 아닌 것과어울리는 '먹다'를 알려주면 B는 또 어떤 제스처를보일까? 나른한 오후 옛 동료들과 커피를 먹으며 아작아작커피 씹는 흉내를 내던 활기찬 B를 떠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