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의 엄마가 되어가는 시간
비 오는 일요일 저녁 주말 내내 집에 있던 고등학교 1학년 딸이 친구 만나러 나간다고 한다.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데, 나가서 저녁 먹고 온단다. 탐탁지 않지만 나갔다 10시 전에 오라고 할 심산이었는데 아빠가 나선다. 나갔다가 들어올 시간에 어딜 나가냐며 안된다고 한다. 아이는 볼맨소리를 하며 다른 애들은 다 나오는데 왜 자기는 안되냐고 한다.
아이가 볼맨 소리를 하니 아빠가 한발 물러나 9시까지 오라고 한다. 친구들 만나기로 한 곳이 아무리 집 앞 전철역이지만 왔다 갔다 20분 빼면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단호한 아빠 표정을 보니 나설 수가 없었다. 저리 단호한 아빠말의 권위를 떨어트릴 수는 없잖는가? 그렇게 아이를 내보내고 우리끼리 저녁을 먹는데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이가 저녁시간에 혼자 나가는 게 처음이다. 서울에 콘서트나 K팝 관련 시상식에 간다고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온 적은 있지만, 전용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왔으므로 딱히 혼자 돌아다닌 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모에 전혀 관심 없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살짝 색이 들어간 자외선 차단제와 립밤을 바르고 다니는데 고슴도치 엄마눈에 그것만으로도 눈부시게 화사해 보인다. 여중에 다니고 학원에 다니지 않아 남자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었는데,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라 혹시 이 저녁에 남자아이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부모의 걱정은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다. 걱정한다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나이면 부모눈을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물론 지금 당장 내 아이가 나쁜 짓을 할까 걱정하는 건 아니다. 연루되지 않았으면 하는 일에 얽히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이 더 맞을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직은 그냥 밤에 혼자 나가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아 그저 바라보는 엄마에게도 적응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럼에도 밤에 혼자 다니는 걸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다.
미국에서 지내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초등 저학년이거나 더 어린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아파트 앞 큰 길가에 돌아다니는 게 몹시 위험해 보이고 이상해 보였다. 단순히 아파트상가에 군것질 거리를 사러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초등학생인 경우 상점가에서 아이들끼리 돌아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의 경우 12세 미만의 아이가 혼자 다니거나 집에 혼자 있으면 보호자를 방치나 학대로 처벌할 수 있다.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우리 가족이 있던 곳은 5학년부터 보호자 없이 등하교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서 가게에 가거나 하진 못하고 아이들끼리 집에 두거나 30분 이상 차에 둬도 안된다. 만 16세 이상인 경우 하루이틀정도 혼자 집에 있을 수 있지만 이틀이상은 안된다. 10대 후반 아이들이라고 해도 10시 이후에 돌아다니는 것이 불가능하고 16세부터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하지만 일몰시간 이후 보호자 없이 운전하기는 불가능하다.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기 전엔 부모의 관리를 받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 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혼자서 학원에 가고 10시 이후에 집에 오는 경우가 흔하다 보니 밤에 다니는 데에 경각심이 덜한 것 같다.
아이에게 9시에 큰 길가 육교라고 전화가 왔다.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못 가게 막아서 9시까지 집에는 못 갈 것 같다한다. 10분쯤 늦은 건 괜찮으니 조심히 오라 했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 아쉬웠지만, 아빠의 지시를 따르려 한 아이가 고마웠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모임이 일찍 끝나 다른 아이들도 다 집에 갔다고 한다. 역시 아무 문제없었고, 아이들은 순수하게 어른의 지시를 따랐다. 지시가 없는 어른이나 과도한 통제가 있었다면 오히려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비 오는 일요일 밤 딸아이를 불러낸 그 아이도 학원이 조금 일찍 끝나는 일요일 저녁이라 가까이 사는 여자 친구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다. 한 반에 여자애들이 8명뿐이고 학기 초라 그 자리에 빠지기 싫었던 맘도 이해한다. 리더 역할을 좋아하는 그 아이도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과 나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요즘애들이 좋아하는 마라탕 대신 매운 걸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파스타집에 갔다는 걸 보면 자기들끼리 열심히 소통하고 협의하는 모습이 상상이 돼 기특하다.
내가 고등학교 때도 한여름이 아니고는 해가 있는 시간에 집에 있기 힘들었다. 학교 수업이 거의 9시 10시에 끝났으니 10시까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10시 이후에 들어가는 거에 부모님의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어쩌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도 늦게 들어갈 수 있었다. 때로는 정규수업 이외의 것들을 빼먹고 혼자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나도 기억에 남을 만한 나쁜 짓을 하진 않았다. 신촌의 레코드가게나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학교생활이 힘들고 지겨워 작은 일탈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이를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너는 하지 말란다고 안 했니?'. '너는 공부하란다고 공부했니?'라고 되묻는다. 친구로서 참 별로인가? 그렇지만 너무 뻔뻔하게 아직 의지가 약하고 덜 자란 아이를 모지리 취급하는 엄마들을 보면 적잖이 화가 난다. 더구나 내가 제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데 말이다. 우리 다 그 시절을 지나왔는데 왜 그 마음을 이해 못 할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거리와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만 염두해도 그렇게 통제하려 들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나랑 같지 않아도, 하라면 더 하기 싫고 그저 염려에서 하는 잔소리가 얼마나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을 남기는지 잘 기억해 봤으면 좋겠다.
내 아이가 이번처럼 엄마 아빠가 점점 저가 많이 컸고 거리를 더 둬야 한다는 걸 깨달을 시간을 주면서 컸으면 좋겠다. 적응할 시간을 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