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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로 더 가까워진 우리 사이

묻지 않던 사이에서, 묻고 답하는 사이로.

by 피터의펜

우리 사이에는 깨지지 않는 작은 공식 하나가 있었다.

이름하여, '학원 숙제는 질문 사절'.


서로 더는 싸우지 않기 위해,

감정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특히 수학 학원에서 숙제로 내준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도, 답하지도 않기로 약속했다.


말만 들으면 딱딱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의 마음을 아끼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만큼 우리 사이에 감정이 오갔던 적도 많았다는 뜻이다.


"질문은 학원에 가서 선생님한테 해."


예전 부모님 세대는 현찰 박치기의 시대였다. 암산이 생활이었고, 졸업 후에도 산수는 계속 쓰였을지 모른다. 반면 나는 로또를 살 때 말고는 현금을 쓸 일도 없고 계산은 카드 단말기가 대신해 준다. 산수조차 써먹을 일 없는 삶인데, 갑자기 수학 문제를 풀라니 어림없는 소리다.


그래서 아이가 고학년이 되며 수학이 어려워졌을 때 나는 이미 지원 불가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과 상관없이 아이는 숙제가 막히면 언제나 우리에게 짜증을 냈다.


"이 문제만 알려주면 안 돼?"

"아니야. 질문은 선생님한테 해야지."

"그냥 좀 알려주면 안 돼?"


이렇게 대화는 오선지의 도돌이표처럼 끝없이 반복에 또 반복이었다. 그러다 생긴 우리만의 규칙, '질문 사절'. 이유는 단순했다. 도와줘봤자, 서로 기분만 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도움을 받았다는 걸 숨기고 싶어 했고 나는 머리를 쥐어짜 겨우겨우 설명해도 "선생님은 그렇게 안 풀었는데?"라는 말이 돌아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숙제를 도와줘도 배우는 자세보다는 "나도 알아." 하는 기고만장한 표정이 한 번 스치면 나도 사람인지라 하루 종일 마음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묻지도 말고, 알려주지도 말자’는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


그렇게 1년. 우리는 아주 평화롭게 지냈다.


아이는 혼자 공부하는 데 익숙해졌고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하려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나도 "그래, 이 방식이 우리에겐 맞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요를 깨는 한마디.


"나 이거 풀어주면 안 돼?"


...

아뿔싸. 싸우자는 건가?


1년 넘게 지켜온 규칙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눈이 마주쳤고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진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너 이거 풀어줘 봤자, 결국 또 '그거 아니야'라고 할 거잖아. 우리 그냥, 싸우지 말자."

"아니야. 나 이제 안 그래. 알려주면 진짜 잘 배울게."


아이의 표정이 진지했다. 울먹임이 섞인 다급함도 보였다. 한두 번 듣던 소리라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쯤 되면 무너져야 한다. 우리의 규칙도, 나의 고집도.


슬쩍 보니 문제는 각도 구하기. '각도기를 로켓배송으로 사줄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이는 간절해 보였고 나는 이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를 읽는 순간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둘이 머리를 맞대고 30분을 붙들었지만, 결국 풀리지 않았다. 해답지도 없다.


결국 구원의 손길, 수학에 강한 엄마를 호출했다.


엄마와 아이가 씨름하기 시작했고 20분쯤 지나 드디어 정답이 나왔다. 아이의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고 나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세운 '질문 사절'은 싸우지 않기 위한 규칙이었지만, 오늘 아이가 그 규칙을 깬 건 싸워도 괜찮을 만큼 부모를 믿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아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꺼내기까지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먼저 용기를 냈고 1년간 굳건히 쌓인 마음의 벽은 조용히 허물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어쩌면 오늘은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정답을 찾은 날이었다.



아빠의 부록 조언


도움은, 주는 사람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받는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오늘 너는 그 어려운 준비를 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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