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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의 날, 용기를 배웠다

아들의 발치, 그리고 아빠의 성장기

by 피터의펜

어릴 적, 우리 아버지가 어느 날은 한쪽 뺨이 퉁퉁 부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나는 동네 불량배에게 맞고 오기라도 한 줄 알고 놀라서 다급하게 물었다.


"아빠, 무슨 일이야?"


아버지는 부은 볼을 손으로 살짝 누르며 어눌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임플란트 하려고 이빨을 하나 뽑았어. 괜찮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말라 하셔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약국에서 '이가 튼튼해진다'는 영양제를 사다 드렸고, 그 돈을 마련하려고 저금통을 뜯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그날의 충격 때문일까. 그 뒤로 나는 이빨 관리만큼은 철저히 하며 살아왔다.


그날 밤, 아버지는 부은 얼굴로도 나를 먼저 안심시키며 "괜찮다, 약 먹으면 곧 나을 거야." 하고 웃으셨다. 심지어 내가 건넨 영양제를 드시며 "우리 아들이 사 온 약이라 그런가, 금방 낫겠다." 하며 농담도 하셨다.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고, 이상하게 그때부터 이를 잘 닦고 치과를 제때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백 번의 교육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오래 남는다는 말은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름 부지런히 스케일링을 받았고 엑스레이도 꼬박 찍으며 치과에 다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게 잘 안 됐다. 치과 예약은 늘 '아이 챙기기'라는 이유로 미뤄졌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결국 치과는 나에게 조금씩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다.


지난주,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예약했다.


"아들아, 아빠 치과 갈 건데 같이 가자."

"왜? 나도 해야 돼?"

"아니야, 그냥 같이 가서 끝나고 맛있는 거 먹자."

"응."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 믿었겠지.


진료를 받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했다. 보험 되는 스케일링 한 번 받는데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레진 두 개만 하면 된다고 하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욕심이 나왔다.


"아들아, 너도 온 김에 검사만 한 번 받고 가자."


그 말에 아이는 굳어버렸다. 표정은 금세 사색으로 변했고 나를 향해 '배신자' 같은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검사만 하는 거야.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면 안 해도 되잖아."


그렇게 달래서 들여보냈는데, 조금 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유치를 지금 뽑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아직 많이 안 흔들리던데요?"

"맞아요. 그래도 새 이가 올라오고 있어서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검사만 하자고 했는데 결국 발치라니. 아들의 원망이 눈빛에 가득했지만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더 괴로웠다.


그래도 오늘 미루면 또 못 올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차분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안 하면 다음에 또 와야 하는데, 그때도 무서울 거야."

"오늘 해버리자. 끝나면 선물 하나 사줄게."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기계음과 짧은 신음소리가 묘하게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끌어올렸다. 치과 의자에 앉기까지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건 나의 어린 시절에도, 지금의 아이에게도 같았다.


발치를 결심한 아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통은 대신해 줄 수 없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잘 견딜 거라 믿으며 대기실에서 조용히 응원을 했다.


잠시 후, 아이가 돌아왔다.


"벌써 끝났어?"

"응. 선생님이 마취 잘 됐는지 본다더니, 그때 뽑은 거였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선생님께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입에 물었던 솜을 뱉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배고프다던 말도, 선물 얘기도 다 잊은 채로.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겠지.


나는 조용히 아이 곁에 앉았다. 소파에 기대 잠든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과 피로가 엉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울 듯 말 듯하던 표정이 이제야 편안히 풀려 있었다.


"오늘 정말 잘했어."

작게 중얼거렸다.

"무서웠지? 그래도 끝까지 용기 내줘서 고마워."


아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낯설지 않았다.


오늘 나는 아들의 용기 덕분에 다시 한번 부모의 마음을 배웠다. 그리고 내일은 또 이 아이의 마음에서 무언가를 배워갈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부록 조언


용기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믿음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오늘은 아들이 용기를 냈고,

나는 그걸 지켜보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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