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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밤 몇 알의 행복

겨울을 견디게 하는 작은 맛

by 피터의펜

군밤을 먹기 위해 겨울을 기다렸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싶지만, 사실이다.


우리 집은 겨울이면 군밤을 먹는다.


여름 내내 가시송이 안에 꽁꽁 숨어 영양을 차곡차곡 모은 밤이 가을바람을 지나 단단하게 여물어야 비로소 '군밤용 밤'이 된다. 그 맛이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지만,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군밤을 더 '겨울스러운 맛'으로 만든다.


맛밤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맛이다.


길 건너 야채 가게에서는 앞치마 두른 총각들이 작은 상자에 담아 만 원을 부르고, 대형마트에서는 아주머니가 종이봉투 하나에 오천 원을 받아도 나는 늘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군밤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까먹게 되고, 다 먹고 나면 우리 가족 누구든 꼭 같은 말을 한다.


"아... 조금만 더 살걸."


하지만 한 상자를 더 사기엔 또 속이 쓰리다. 내가 무슨 골목상권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리 겨울이라도 지갑은 상황 봐가면서 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야채가게 앞만 지나면 마치 아빠한테 군밤을 맡겨놓기라도 한 사람처럼 당당한 표정으로 외친다.


"아빠, 군밤 사 먹자!"


하필이면 그 군밤 가게가 애들 수학학원 1층에 있으니, 일부러 돌아서 갈 길도 없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군밤 냄새는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공기나 마찬가지라 그 길을 외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그래,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오븐 뒀다 뭐 해.'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군밤을 구워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구워본 고구마 경력 하나는 확실하다. 가스레인지 과열 방지 센서에 오히려 짜증이 났던 시절부터, 에어프라이어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나는 매년 몇 번씩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군고구마를 믿는 내 마음이, 결국 군밤에도 자신감을 줬다.


적어도 닭요리처럼 냄새 때문에 아이들이 도망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닭요리는 레시피대로 했는데 아이들은 "똥 냄새가 나!!"라며 도망갔던 일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요리로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조용한 합의가 생겼다. 무리해서 만들지도 않고 지나치게 권하지도 않게 되었다. 말 그대로 먹으라는 아빠도, 못 먹겠다는 아이도 모두가 피해자였던 기억이다.


하지만 군밤은 다르다. 실패할 가능성이 적다. 분명하게 나는 그 맛을 잘 알고, 아이들도 그 맛에 익숙하다. 군밤 정도면 오븐이 알아서 다 해줄 테니까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알밤 한 상자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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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상자를 열어보니 밤은 단단했고, 색도 고왔다. 보는 순간 이게 진짜 밤색이구나 싶었다. 딱 봐도 '구워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오븐을 예열했다.


인터넷 레시피에는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 25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20분을 먼저 돌렸고 이어서 10분을 더 돌렸다. 내 취향은 언제나 웰던 쪽에 가까우니까 차라리 이게 더 속 편하다.


타이머가 울리고 문을 열자 오븐 안에 고여 있던 뜨거운 증기가 확 올라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아주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 이거다.

그 야채가게 구석에서 퍼져 나오던 바로 그 냄새다. 그야말로 싱크로율 99%의 성공 냄새를 맡은 거다.


내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종이봉투에 옮겨 담으면 진짜 사 온 군밤이라고 해도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이거 무슨 냄새야?"

"응, 군밤 가져왔어. 한 번 먹어봐."


'사 왔다'라고 하면 곧 들킬 것 같았고, '내가 만들었다'라고 하면 또 괜히 티 날까 봐 절묘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가져왔다"라고 했다.


껍질을 까서 한 알 입에 넣어주니 아이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맛있다!"


그 표정을 보자, 나도 더는 감추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아빠가 만든 거야."


"뭐라고? 진짜? 군밤을? 아빠 이거 팔아도 되겠다!"


잠깐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피곤이 사르르 풀렸다. 아빠 인생에서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칭찬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이들은 모를 거다.


사실 실패할 걸 대비해 알밤 15개만 구웠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와서야 조금만 구운 게 아쉽지만, 오늘만큼은 이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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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밤 몇 알에서 이렇게 큰 기쁨이 생기는 날도 있는 거다. 겨울은, 어쩌면 이런 조그만 성공을 품고 오는 계절이다. 그리고 가족이 그 성공을 같이 나누는 계절이기도 하다.


오늘 밤도 알밤 한 상자를 더 주문할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군가는 껍질을 까서 한쪽에 쌓아두고, 누군가는 뜨겁다며 손가락을 호호 불고, 또 누군가는 군밤 하나 들고 티브이 앞에 앉아 꼬물거릴 것이다.


별건 아니지만, 이런 풍경이 겨울을 더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내가 겨울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 조용한 장면들 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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