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자라는 것이 있다
요즘 우리 가족의 생활에서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동안은 집 안에 들여놓지 않던 식재료들이 조용히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보카도도 그중 하나다.
멕시코에 가본 적도 없고, 아보카도가 들어간 음식을 자주 먹는 편도 아니라 살아생전 내가 아보카도를 돈 주고 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밖에서는 멕시코 음식점에서 과카몰리에 나초를 찍어 먹은 적이 몇 번 있다. 맛은 있었다.
하지만 쌈장처럼 중독적인 매력이 있는 것도, 된장처럼 강렬하게 오래 남는 맛도 아니었다. 한 끼 식사로 '건강하고 괜찮네' 정도의 감상이었고, 굳이 내가 사 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숲에서 나는 버터'라는 별명처럼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 덕분에 아보카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어느 식당에서는 아보카도와 계란 그리고 간장 조합의 비빔밥이 인기라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집엔 아보카도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가족에게는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규칙이 하나 있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산다."
과일이 맛있다는 건 모두 알지만, 문제는 껍질을 깎는 노동이다. 아이들은 직접 칼을 못 쓰니 엄마나 아빠가 과도를 들어야 하는데 이게 또 생각보다 귀찮고 번거롭다. 그리고 또 어쩔 땐 무섭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자주 등장하는 과일은 딸기, 포도, 적포도, 샤인 머크캣, 방울토마토, 대추방울토마토, 자두 같은 것들이다.
사과도 껍질째 먹으니 괜찮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이 스타벅스에서 과일 컵을 몇 번 먹어본 뒤로 오히려 껍질째 먹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편견이 없는 아이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서 보기 힘든 대표 과일이 수박과 아보카도였다.
수박은 '껍질을 깎는 순간 세균이 번식한다'는 말을 듣고 괜히 무서워 사지 않게 되었고, 아보카도는 껍질이 단단하고 먹는 방식도 우리 정서와 잘 맞지 않아 계속 미루는 과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트에서 아보카도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8개 3천 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시 못 볼 가격이었다. 이런 인심 좋은 가격 앞에서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미친 듯이 골라 담는 나를 마트 사장님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보카도로 무언가를 요리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씨앗을 가지고 싶었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칼집을 내고 좌우로 비틀어 씨앗이 '톡' 빠져나오는 모습. 왜인지 늘 그 순간이 신기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칼집을 내고 양손으로 아보카도를 비틀었다.
정말 된다.
꿈만 같았다.
그렇게 씨앗 8개를 얻었다.
씨앗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발아를 시켜보고 싶어졌다.
축축한 키친타월 위에 씨앗을 올려두고 매일 들여다보았다. 물이 마를 때쯤이면 다시 적셔주고 얼른 뿌리를 보여달라며 기타를 쳐주기도 했다.
(그 소리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한 달 동안은 아무 변화가 없더니 어느 날, 껍질 사이로 새하얀 뿌리가 살짝 밀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작은 씨앗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그리고 자라려 한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바로 수경재배 통을 주문했다. 동그란 씨앗 위로 새싹이 오르고 아래로 뿌리가 길게 내려가는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매일 들여다보면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게 정말 나무가 될까?
검색해 보니, 아보카도 씨앗은 발아는 잘 되지만 열매를 맺기는 거의 불가능하단다. 실내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보통은 접목을 해야 하고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 말은, 씨앗에서 키운 아보카도는 수확용 이라기보다 '그냥 우리 집 마당에서 함께 자라는 나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애틋해졌다. 열매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냥 나무가 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밖에서는 겨울이 시작되고 모든 나무가 활동을 멈추고 있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보카도가 한창 크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아보카도는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길 때 비로소 살 수 있는 과일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먹을 과육보다, 언젠가 나무가 될 씨앗을 떠올리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 천천한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올겨울, 우리 집에서 가장 성실한 건 어쩌면 이 아보카도 씨앗이다.
열매는 못 맺는다 해도 매일 조금씩 길어지는 뿌리를 보고 있으면 겨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아이는 묵묵하게, 그리고 조용히 자기만의 봄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