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으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한국이 그립다. 아무리 미국 생활의 좋은 점만 탈탈 털어 나열해도 한국이 100% 그립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완전한 복귀 전, 굳이 한국에 갈 정도로 사무치게 그립지는 않았는데 미국 생활 1년 만에 한국을 가야 했다. 이유는 대면으로만 가능한 은행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왕 가는 한국행이니 일주일은 넘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남편 근무 때문에 3일 정도 겨우 확보했다. 한국에서시차적응을 다 했나 싶을 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꼴이다. 한국에 간다는 걸 처음에 여동생에게만 알렸다. 여동생 집이 공항 접근성이 좋아 이번에 거기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그동안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의 불찰로 미국에서 비대면 은행 업무가 불가능했기에 비행깃값만 250만 원이 넘는 돈을 낭비해서 한국을 가야 한다는 자체가 짜증인데, 경유도 해야 해서 왕복 약 40시간의 고단함이 예상되니 미리 지치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은행 업무가 한국에서 잘 처리될지도 미정인 일이라 걱정과 압박이 내 일상을 파고들어서 곯는 것 같았다. 혼자서 미국 공항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내가 어리바리하게 여러 손해를 보는 실수를 하진 않을까 나 스스로의 불신도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비행기를 제시간에 잘 탔고 은행 업무도 잘 해결되었다. 그제야 이 고단한 한국행 일정에서 일종의 보너스로 남겨둔 '재미'를 차근차근 즐길 수 있었다. 그건 바로 1년 만에 보는 가족과 짧은 만남, 여행자의 눈으로 한국의 풍경, 음식 즐기기이다. 늦은 저녁에 한국에 도착했고 출발하는 날은 새벽에 나가니 사실상 한국에 겨우 2일 있는 셈이다. 그중 하루는 오전에 은행 업무를 봐야 한다. 도저히 사람들과 약속을 맞출 수 없는 일정인데 정말 우연히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 남동생이 내가 신세 지고 있는 여동생 집을 방문하기로 몇 주 전부터 약속한 거다. 여동생이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아이 용품을 사주는 명목이라고 했다. 덕분에 이번 한국 방문에 온 가족을 다 볼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오자마자 여동생은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인 처갓집 양념치킨, 떡볶이를 시켜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동생의 신혼집 주변을 구경했다. 이른 아침에도 걸을 수 있는 한국의 거리가 그리웠다. 걷다가 거리 구석에 노숙자가 아닌작은 구두 수선집이 보였다. 칼과 가위도 갈아준다는 안내문도 있다. 인건비가 미국에 비해 저렴한 한국은 소박하지만 일상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적당한 가격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24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도 오랜만에 보니 새로웠다. 한국인의 수준 높은도덕의식이 돋보이는 엄청난 가게였다. 한국에 살 때 거리의 핸드폰 가게의 조명을 보면 빛이 강해 눈이 아플 정도 과하다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어둑해진 거리를 밝히는 셀프 가로등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고 있는 동생을 깨우지 않고 아침밥으로 뼈해장국을 먹기로 했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뼈해장국집에 들어갔다. 이른 시각에 여자 혼자서 밥 먹는 게 신기한지 아니면 외로우셨는지 사장 내외분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마지막 질문은 "결혼은 했어?"였는데 내가 했다고 하자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시면서 "그래...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라고 말끝을 흐리시는 걸 보니 사장님 자녀분들이 아직 싱글인 것 같다.
그날 은행 업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동생과 데이트했다. 동생은 만삭처럼 보였는데 동생은 공식적인 만삭 주수가 되기 약 일주일 전이라고 했다. 주수에 민감한 임산부다. 서점으로 가서 미국에서 귀한 아이용 한글책 4권을 구입했다. 거리에서 오방빵, 땅콩빵 가판대도 만났다.
오방빵, 땅콩빵 가판대
오래된 친구를 본 듯 반가워서 구입했으나 너무 물컹했다. 그래도 구입한 양의 절반 이상은 먹었다. 동생과 나는 거리에 서서 한참을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로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짧은 여행은 그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만 사는 기분이다. 모든 시간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 그 말은 사실이다. 그래서 매사에 의미 부여가 된다. 결론은 메뉴를 잘 골라야 한다. 점심은 김치제육 두루치기로 정했다. 양이 많아서 둘이 먹으면 남기게 될 거라던 동생의 우려와는 다르게 여자 둘 (+엄마 배 안에 있는 남자아이 한 명)이 거의 다 먹었다. 동생 생일(심지어 내 갑작스러운 한국 방문 기간엔 동생 생일도 껴있었다)이라 가게에서 케이크를 사면서 진열대에 놓인 귀여운 컵들을 구경했다. 한국에는 귀여운 이미지들이 도처에 널렸다. 귀여운 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귀엽다.
집에서 휴식 후 시장 구경을 하러 나갔다. 잠옷 바지랑 아이 잠옷 세트를 샀다. 미국에서는 작은 내 키에 맞는 바지를 사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바지를 사면 길이를 수선하지 않아도 된다. 임신 중인 동생은 자주 화장실을 가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동생은 시장이 좋은 이유가 "여기서는 진짜로 살 수 있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동생은 한껏 사치스러운 말투로 "시장에서는 나는 (특정 품목의 경우) 가격을 묻지도 않고 사"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시장을 구경하기 전에 작은 규모의 백화점에 갔는데 가격을 확인하고는 단 한 개의 물건도 사지 않았다. 우리는 관람객처럼 백화점이라는 현대 공산품을 전시한 갤러리를 '구경'만 한 것이다. 시장에서 우리는 소비자로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시장에서 우리는 적극적인 소비주체로서 묘한 당당함이 있다. (내면의 당당함임을 강조한다.) 그러니 시장에 관한 동생의 표현은 사실이다. 저녁에는 마제 소바를 배달시켜 먹었다.
다음 날은 부모님, 막냇동생이 와서 엄마표 집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낙지볶음, 갈비찜, 다양한 김치를 먹었다. 식사 후 다시 동생 집 주변을 산책했다. 빈티지 소품 가게 입구에서 가게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사장님이 안 사고 구경만 해도 된다고 초대해 주셨다. 내가 안 사게(못 사게) 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실실 웃음이 나오는 걸 잘 참고 안으로 들어갔다.
빈티지 소품 가게 내부
사장님과 자연스럽게 약간의 대화도 했다. 사장님은 10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하시면서 이 소품들을 사 모으셨다고 했다. 자식 같은 물건을 다른 사람이 이뻐해 주는 것만으로 행복하시다고 하셨다. 그래서 텐션을 최대한 끌어올려 더욱 열심히 이 소품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 떠들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사장님과 헤어졌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하자 엄마는 "와, 너 변했다. 너 사람하고 말하는 거 싫어했잖아"라고 말하면서 미국이 사람 만들었다고 좋아하셨다.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번 한국 방문 마지막 날, 고대하던 저녁식사 시간이다. 우리 가족은 곱창구이와 곱창전골을 전투적으로 먹었다. 각자의 개성으로 도무지 의견이 수렴되기 힘든 우리 가족이 한마음으로 단합되는 시간이었다.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열정적으로 최고의 먹코스를 짜가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새벽에는 남동생도 방문해서 오랜만에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남이 들으면 세상 지루한 이야기인데 유년기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나에겐 흥미로웠다.
짧은 여행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간다. 공항버스에 올라 내 좌석에 앉는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인공눈물처럼 떨어졌다. 눈물의 출처가 너무 복합적이라 그 출처를 일일이 찾아보러다 그냥 포기했다. 비행기를 약 17시간이나 타야 하니까 정신을 잘 붙들고 있어야 했다.
혼자 오는 인천 공항은 삭막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게이트로 가기 전에 아침밥을 먹었다. 중식을 못 먹었기에 중식(짜장면, 탕수육)으로 골랐다.
약 3일 동안 한국에서 지내다가 미국에 오니 내 가족을 본다는 안정감과 다른 나라에서 지내야 하는 피로감을 동시에 느꼈다. 다시 미국에서의 일상이다.
한국에 가보니 주변에 한국어가 들린다는 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소외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미국에서 주변에 서라운드 사운드로 들리는 영어들은 뭐라 하는지 모르는 말이 많았다. 그래서 걷기만 해도 약간은 외로웠다. 예전엔 여행을 가면 내 한국말을 주변 현지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재밌고 짜릿해서 한국어로 마구 떠들었는데 여기서는 현지인과 섞여야 하는 상황이라튀어 보이기 싫어 점잖아진다.
예전엔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게 여행이고,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가는 건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지금은 그 반대이다. 안팎이 바뀐 기분은 약간 생소했다.내 안에 굳건히 믿었던 크고 작은 경계들이 같이 허물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