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같이 듣는 내 클래스 메이트, 친구들을 보면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나이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나라도 달라서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다른 우리였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은 비슷해서 우리는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영어 수업을 듣는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수업 친구들은 타국살이의 은근한 의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소소한 애정과는 별개로 친구들의 영어는 대부분 각 나라의 민속 노래나 민속 랩(민속 랩이 있다면 분명 그런 형태일 것이 분명하다)으로 들렸다. 수업을 듣다 보면 선생님의 영어는 익숙해진다. 하지만 수업 중 친구들이 영어로 말해야 하는 지점이 오면 '지금이 쉬는 시간이군'이라며 멍 때리면서 집중력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일이 많았다.
교훈도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친구들의 영어발음을 들으면 반면교사할 부분이 보였다. 쉼 없이 빨리 다다닥 말하지 않기, 강세 지키기, 비언어적인 표현에도 신경 쓰기 등 친구들을 통해 '영어는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다'라는 좋은 예시를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왜 원어민이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지 팩폭 당한 기분이었다. 한 번은 인도인 친구가 말하고 난 뒤 선생님이 나에게 "너 00(인도인 친구 이름)이 한 말 다 알아들었어?"라고 기습 질문을 하시는 거다. 나는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못 알아들었어"라고 말했다. 내 답변은 선생님의 엄한 웃음벨을 눌렀다.
어떤 날에는 영어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자체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심리치료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 자신이 좋아서 영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업 중에 미국생활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을 얻을 때면 비록 그 정보가 정말 소소했음에도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겠어'라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수업 듣기를 잘했다고 혹은 나아가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과한 의미부여를 하며 즐거워했다. 수업 중에 알게 된 선생님과 친구들의 추천 여행지는 주말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업 중에 마냥 기분 좋은 에피소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떤 날은 어색한 웃음을 장착하여 더듬더듬 겨우 영어로 발표했는데 선생님이 아무 리액션 없이 바로 다음 학생에게 질문을 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한 꼴이 돼버려 무안했다. 종종 잘하는 한두 사람이 수업 중 거의 모든 대화를 독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영어 실력이 월등한 친구들의 영어가 돋보이도록 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는 들러리가 된 기분이었다. 수업 내용과 상관없는 선생님의 짜증 섞인 개인적인 불만들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의 행정적인 질문에 선생님이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게 "나중에 알려줄게! 진정 좀 해!"라 말하는 걸 듣고 대리 민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선생님도 인간이기에 지친 날도 있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학생에게 영어로 말을 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어 정작 학생의 대답에는 관심을 덜 가질 수도 있다. 또한 행정적인 업무는 선생님에게도 귀찮은 일이 분명하니 머리로는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 그냥 그런 날은 영어 자체가 꼴도 보기 싫고 수업에 진저리가 난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되는 기분을 스스로 받아 가며 수업을 버티는 느낌도 들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실수하기 싫은 날'도 있다. 수업하려고 태블릿을 꺼내는 데 딱 거울같이 느껴졌다. 영어를 하는 건 항상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작은 실수든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든 영어로 말하다 보면 아무래도 한 번 이상 어색하게 말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말하게 된다. 영어로 대화하는 건 그런 실수를 매번 마주하는 거울같이 느껴진다. 내 부족함을 계속 확인하는 느낌이다. 도망가고 싶고 딱 화면을 꺼버리는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조금은 길어진 얼굴로 암울하게 태블릿 전원을 힘겹게 눌렀다. (듣기는 들음)
이래나 저래나 ESL 수업을 통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도 만날 수 있고 가르칠 준비가 된 미국인에게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건 특별한 경험이 분명하다. 다만 이 과정이 생각보다 귀찮고 성격에 따라서 부끄러운 순간들을 견뎌야 한다. 미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계속 상기하는 문장이 있다. 외국에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통하는 언어 습득 방법인데 바로 다음과 같다.
불편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서 그 나라 언어를 배워야 한다.
너무 단순해서 의미 없이 보이는 문장 같지만 난 이 문장으로 위로받았다. 계단식으로 언어가 발달한다는 전제하에 그 계단 위로 올라가는 순간은 대부분 불편한 상황 속에서 영어를 하다가 얻게 된 언어적 통찰이다. 그 통찰은 그동안 가진 언어적인 의문과 어려움을 일시에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영어를 써야 하는 거의 모든 상황은 내게 불편하다. 아직도 긴장되고 그 순간들을 피할 수만 있다면 요리조리 피하고 싶다. 그런 나에게 저 문장은 그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꼰대스러운 문장에서 잔잔한 격려를 느낀 것이다. 여하튼 그 문장을 마음에 새기며 불편한 순간들을만들어 견디는 중이다. 노력하다 보면뭐든 천천히 나아질 거라던 어릴 적 어른들의 말에 의탁해 본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내면 구석에 점유하던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에 대한 같잖은 열등감이 자연스럽게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열등감이라는 건 아무리 "나 그거 아닌데?"라고 속여도 잘 숨겨지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어색한 변명의 순간을 잘 눈치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구린 행동의 이면에는 분명 어떤 열등감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타인의 열등감에 대한 센서가 다들 탁월하다. 이런 열등감 감별사들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나의 옅어진 열등감은 내 미국 생활의 선물이기도 하다.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미국에 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사라진 거라 예상치 못한 선물이 맞다. 단순히 외국에 나도 살아본다!라는 객기로 사라진 건지 미국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삶이 내민 도전들을 마주하다 보니 그 열등감이 설 자리를 못 찾고 슬그머니 사라진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여러 경험을 하다 보면 시야가 넓어져 그동안 갖고 있던 좁은 관점이 허물어진다는 인생의 이치가 나에게도 적용된 것 같다.
오랜 기간 쌓은열등감을 무기로 이 사람 저 사람 찌르고 다니면서 흑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참 불쌍하기도 하고, 상종하기 싫기도 하다.
그렇게 상종하기 싫던 내 모습 중 하나와 작별하니 들러붙었던 내 열등감의 무게만큼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