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청춘의 일부를 캐나다 워홀로 보낸 친구는 귀국 후에 로키마운틴을 가장 그리워했다. 친구는로키마운틴 사진을 USB에 담아 내 신혼집 작은 TV에 연결해서 나에게 보여줬다. 그리곤 첫마디가 "아... 사진으론 표현이 안되는구나...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쉽다..."였다. 친구가 얼마나 로키마운틴을 애정하는지, 나를 좋아하는지 동시에 실감했다.
그래서 미국 텍사스에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주(州)로 떠난 여행지가로키마운틴 국립공원이 있는 콜로라도다. 텍사스에서 콜로라도를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로드 트립, 비행기+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후자를 이용했다. 로키마운틴을 차로 관광하려면 로키마운틴 홈페이지에서 차량 입장이 가능한 날을 확인한 후, 입장권을 미리 사야 한다. 경쟁이 치열하니 판매가 시작되는 날을 달력을 표시해 둔 뒤 표가 매진되기 전에 빨리 구입해야 한다. 세상 느긋해 보이는 미국인들이 놀 때만큼은 누구보다 뒤처지지 않는다.
텍사스 여름에 방문한 로키마운틴은 새하얗게 덮인 설경으로 눈이 부셨다. 입이 벌어지는 장엄한 규모의 대자연은 한눈에 다 담을 수도 없었다.고개로 만들 수 있는 최대한 큰 반원을 그려가며 천천히 걸으면서 바라봤다. 판타지 소설 속 장면 같은 풍경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했다. 멍하니 넋 놓고 보았다. 이번이 아니면 이곳을 다시 오기 힘들 거라는 현실적인 자각이 들자 눈에 힘을 주어 풍경에 집중했다. 장면들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다. 친구말대로 사진으로는 이 장면을 오롯이 담기 어려울 테니 눈의 감각이 열일하는 수밖에 없다.
글랜우드 핫스프링스 풀
로키마운틴에서 차로 몇 시간을 가면 글랜우드 핫스프링스 풀이라는 약 125년이나 된 유명한 미국 온천이 있다. 하루 이용 티켓을 구입하면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종일 이용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온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거대한 온천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노곤하게 녹이면서 로키산맥을 바라볼 수 있다. 몸을 미네랄 온천물에 정박한 채로 화려한 산을 감상하다 고개를 들면 드높은 하늘이 펼쳐진다. 여기가 지상낙원 같다. 시간이 멈춘 듯 80년대 빈티지한 미국 잡지 속 호화로운 관광지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텔루라이드 거리
이 온천에서 차를 타고 더 가면 텔루라이드라는 스키 타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가 나온다. 우리는 스키장 운영을 하지 않는 여름 비수기에 갔기에 여유롭게 동네 자체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무료로 곤돌라를 타면서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다. 텔루라이드는 거리 자체가 아름다웠다. 미국의 스위스라 할만하다. 전체적으로 잘 관리된 고급 관광지다.
콜로라도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부부는 거의 핸드폰을 보지 않고 자연 풍경이 주는 담백한 재미에 집중했다. 자연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숙소에서 어두운 밤을 피부로 느낄 때는 순식간에 문명과 단절된 것 같은 약간의 무서움도 느꼈다. 아침이면 언제 어두웠냐는 듯 화사한 자연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고도화된 사회 안에서 지내다가 마주한 자연은 그 풍요로움이 주는 아늑함과 아름다움과 함께 오래된 조상이 건넬 법한 위로를 준다. 느리고 묵묵하게 오랜 시간을 살아 낸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사사로운 고민과 감정, 번뇌들은 작아진다.
사회가 정해 준 틀에 박힌 과제들을 누군가는 답답해하지만 나의 경우, 그런 길이 있다는 사실이 편안함을 줬다. 일종의 모범 답안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면 쓸데없이 고민할 시간을 아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 교칙을 의심한 적이 없었고 선생님이나 권위 있는 어른의 말은 진리였다. 때 되면 공부했고, 취업했고(취업하는 과정에서 뒤늦은 자아 찾기가 있긴 했다),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학교에서 일하다가 조금 특별한 선생님을 보았다. 반 아이들을 위해 수작업으로 개인 앨범을 만들어 주고, 매달 편지를 써주고, 학생들의 생일을챙겨준다.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아이들과 상담을 하거나 복도에서 아이들과 농담을 하면서 보내는 사람이다. 금요일에는 수업연구할 자료를 바리바리 챙겨 퇴근하고 월요일에는 주말 동안 고심한 새로운 학습지와 활동지를 책상에 정리한다. 한마디로 존경받을 만한, 사랑스러운 선생님이다. 그런 동료 교사를 본 적이 없다. 인간적으로 신기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던 기억이 난다.
"교직 생활 중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라고 질문했다. 선생님은 "00 학교에 근무했을 때요"라고 말했다. 놀라웠다. 그 학교는 대안학교였다. 학교에 일하면서교직경력과 생각의 크기는 작은 공립학교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대안학교는 전공서에만 있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더 솔직히 말하면 정규교육과정에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도 있었다.
대안학교는 공립학교도 있고 사립학교도 있다. 학력이 인정되는 인가학교도 있고,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비인가학교도 있다. 비인가학교의 다닐 경우 검정고시를 봐서 학력을 취득할 수 있다. 공립대안학교와 인가대안학교는 일정 부분 교육부의 관리 체제 하에 있다. 사립 대안학교의 경우 자연, 예술, 종교, 스포츠 등 특화된 영역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이뤄지는 곳도 있다.
선생님이 경험한 대안학교는 한 반에 약 9명 정도의 소수의 학생들과 자연에서 뛰어놀고 틀에 박히지 않는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장담한다. 그 선생님이 자유로운 교육과정을 통해 만들어 낸 수업들은 학생들의 각자의 개성을 살려내는 것이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재밌었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었을 그 학생들이 부럽다.
대안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있다.
알고 지낸 선배의 자녀가 소위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자녀는 대안학교를 다녔다. 자녀가 대안학교를 다닌다고 말하면 주변에서는 자유로운 부모의 교육방식에 대한 동경과 입시공화국에서 자식을 방치한다는 힐난을 동시에 받았다고 한다. 그 선배는 주변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 같은 성공 신화는 간단하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대안학교 중에는 교육비가 비싼 명문 사립학교가 있다. 대안학교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많은 돈이 투여된 입시교육을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도저히 일반공립학교를 견딜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 학교만 벗어난다면 마음 편히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아이가 자신과 맞는 대안학교의 커리큘럼을 만나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성장한다. 이는 아이의 기질이 (유난히) 평범하지 않은 경우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어떤 사건을 겪고 학교가 지옥이 된 아이들도 해당한다.
주목하고 싶은 포인트는 이것이다. 사실 내 아이가 평범한 일반학교를 다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끔찍한 자연재해 같은 일을 학교에서 겪게 되어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면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된다는 보험 같은 선택지를 알려주고 싶다.
다양한 이유로다수가 선택하지 않은다른 학교를 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길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아내면 된다. 사회가 정한 다수의 길은 각종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가 적절히 얽힌 최적의 자본주의 산물일 수 있다.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도개인의 몫이고 거기서 방향을 비틀어 살아보는 것도 각자의 삶이다.
미국에 살면서도 굳이 미국까지는 와서 사는 다른 한국사람들이 신기하다. 나도 나지만(?) 그들은 왜지?라는 궁금증이 든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더욱더 흥미롭다. 물을 때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돈벌이가 맘에 들지 않아서, 아이 교육문제 때문에, 그냥 한 번쯤 외국에 살아보고 싶어서, 부모와의 갈등 등 정말 가지각색이다. 30년 넘게 한국에서 사는 삶만 보아온 나에겐 그들은 모험가 같고 약간은 무모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뻔한 사실을.
유튜브나 TV 속 '세상에 이런 일이' ,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이야기는 재미로 소비되고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내 앞에서 말하는 이가 그런 삶을 사는 건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실체이다. 삶의 모습은 개개인의 개성이 담긴 얼굴만큼이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미국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삶의 방식에 관한 내 스펙트럼을 넓혀주었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그렇게 살아도 그들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로키마운틴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고, 내가 죽어도, 내 자식과 그 후손들이 죽어도 존재할 로키마운틴에게 우리의 100년도 채 안 되는 생애는 너무 찰나이다. 좁은 사고의 틀에서 한 치 앞만 보며 사는 사람이 로키마운틴 앞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바닥에는 녹지 않은 눈이 보인다. 겨우 딱 두발 사이즈만큼 자국이 남는다. 이 발자국으로 어디까지 걸어 나가볼 것인가. 고개를 들고 다시 본 세상은 희미한 선택지로 가득하다. 희미한 선택지로 가는 발자국은 발걸음마다 또렷하다.비록 다음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덮혀질 테지만 내가 걸어봤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겪은 것들을 제 교직 생활을 반추하여 풀어내고자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시는 분들과 육아하시는 분, 학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적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