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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제이 Aug 24. 2023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유산한 여자의 기록





시술 후 깨어나니 마취약 기운인 듯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직 반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는 새벽부터 응급실에 와서 시술받기까지 긴 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형으로 대화를 하니 벌써 지난 일의 에피소드가 된 것 같았다.



소파술은 당일 퇴원도 가능한 시술이지만 나의 경우 출혈로 인한 추가 시술이 필요한 상황이라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이틀 동안 수술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시술 당일에는 자궁에 거즈를 가득 넣어 막아 놓았는데도 피가 흘렀다. 내가 일어설 때마다 바닥에 피가 떨어져서 나는 누워서 출혈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요



유산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던 간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운이 나빴을 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단지 확률로, 랜덤 뽑기로 걸린 것이라는 말이겠지만, 그로 인해 불운의 연결고리가 이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씁쓸한 위로이다.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삶의 영역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를 모아보면 그것들은 단지 운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삶의 조각들은 어딘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다음 선택에도 영향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유산을 이렇게 겪었지만 출혈이 계속된다면 임신에 방해되는 시술을 해야 하고 그 영향으로 임신과 더욱 멀어질 수 있는 상황처럼 말이다.



.....



나는 언제부터인가 일어나지 않는 일을 걱정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음 상황을 염두에 두는 정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상상한다.


초등학생 6년 내내 나의 담임선생님들은 모두 학생기록부에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아이’라고 적어주셨다.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 한 장면만 그림으로 옮겨도 선생님들은 칭찬을 해주었었다.


그 실력이 나를 걱정인간으로 만드는데 도왔을까? 나의 상상력은 걱정을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상상하는데 쓰이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늙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던 그런 어른이 되었다.



그 날밤 나는 밤새워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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