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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제이 Aug 24. 2023

아직 못 보내겠어요

유산한 여자의 기록






응급실에서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의료진이 엑스레이를 가져왔다. 코로나 때문에 입원 시에는 폐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한다.


초음파로 아기를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닌가? 임산부에게 방사선 검사는 좋지 않을 텐데. 아까부터 의료진들은 규정대로, 매뉴얼대로 하고 있는 게 불만이었다.


나는 초음파를 먼저 해주지 않으면 진상 환자가 될 작정이었다. 초음파를 보고 엑스레이를 찍겠다며 순서만 바꾸면 될 일이니 제발 초음파를 먼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어쩌면 입원을 안 하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 했더니 간호사는 나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입원은 하실 거라고 속삭였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니 간호사가 눈치가 없는 건지 과한 친절을 베푸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는 대로 초음파를 먼저 보게 해 주었다.



초음파실에 누워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믿고 싶었다.

초음파로 이리저리 한참을 들여다본 선생님께서 입을 열었다.

“태아가 심장이 멈춘 것 같네요. 태반은 이미 배출되고 일부 남아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산부인과 갔을 때가 언제지요?”


‘~같다’라는 표현은 확실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인데, 심장이 멈춘 것 같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렸다.

초음파 선생님은 산부인과 담당 교수님도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아침이 되어서 입원실로 갈 수 있었다. 빛나는 분만실 간판이 있는 문을 통과하여 회복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는 환자를 ‘엄마’라고 불렀다. 반대편에 있는 부인과 입원실이 아니라, 산과 분만실이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았다.


나와 같은 병실에는 출산한 산모가 소식을 전하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분만 중인 산모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여러 번 지르더니 이윽고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TV에서나 보았던 출산 과정의 소리를 리얼 사운드로 듣게 되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는 잔칫집 분위기를 망치러 온 불청객이었다. 생의 탄생과 축복이 있는 이곳에 내가 울면서 입장하였기에 어둠의 기운을 한 번에 살포해 버렸다.



"저 여자 유산했나 봐. 우리 작게 이야기하자"라고 말했을까. 같은 병실의 출산한 산모와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속삭이며 대화를 하였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 자막이 저절로  뜨는 것을 막을 수 없어서 차라리 떠들어줬으면 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눈치를 보는 불편한 분위기가 병실을 가득 채웠고, 나는 가진 자의 배려 덕분에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조금 기다리니 급한 대로 산과가 아닌, 부인과 교수님께서 간호사 여러 명을 데리고 진료를 보러 오셨다.

교수님은 간호사에게 약물배출되도록 약을 바로 넣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순간 소강상태였던 내 눈물이 폭발했고, 그 와중에 할 말은 꼭 해야겠어서 엉엉 소리로 말했다.


번역하자면 “교수님께서 직접 초음파를 다시 안 봐도 되나요? 태아 심장이 멈춘 거 맞아요? 확실한 거죠?”


나 빼고 세상 모든 것이 멈춘 듯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통이 서서히 다가왔으면..



나는 시간을 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나에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아직도 나는 상실의 1단계, 현실 부정을 하고 있었기에 내 상태를 본 교수님과 간호사는 나를 달래느라 초음파 영상 다시 보러 가자 하셨다.


이후 만나는 모든 간호사들은 나를 난이도(상) 관심환자로 분류했는지 모두 내 눈치를 보고 위로를 건네주었다. 눈이 부었을 뿐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 때도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때는 나의 슬픔이 커서 주변을 살 필 겨를이 없었지만 그들은 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희로애락 중에 로(怒)와 애(哀)만 겪고 있는 인간들이 모인 곳, 그들을 돌보는 대학병원 간호사는 정말 극한 직업인 것 같다.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왔던 이들에게 감사하다.






 + 추가 설명

병원 의료진의 대응은 잘못된 게 없다. 이미 유산된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응급실 의료진에게는 내가 출혈 사진을 보여주었었고, 교수님은 초음파 영상을 다 확인하시고 진료를 보신 것이지만 아무도 나에게 임신종결 선고를 내리지 못했다. 아니,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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