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우제이 Aug 24. 2023

유산의 좋은 의미 (1)

유산한 여자의 기록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찾아내어 연결한다.

지금 잠시만 슬프고 싶어도 슬픔은 과거의 슬픔을 꺼내오고, 미래의 슬픔도 연결하여 인생은 결국 슬픔이 된다.



누워서 병원 천장을 보고 있자니 천에는 인생의 어두운 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나를 책망하는 시간이 찾아올까 봐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며 ‘유산의 좋은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좋은 의미가 있죠
- 걱정말아요 그대




유산은 임신 체험 기회 얻은 것. 그 기회 덕분에 임신이 주는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남편은 피검사로 임신 수치가 확인 된 순간부터 계속 얼굴에 꽃이 피었었다. 누가 봐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실실거렸다.

자신이 아빠가 될 것이라고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는지 내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자동차 뒷유리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피검사 수치 통과)’라고 문구 스티커를 붙이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이후에도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난황 확인 완료) - (심장소리 확인 완료) 문구로 붙이자며 진심으로 생각해 낸 농담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에는 밤늦게 내가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을 말하자 남편은 자신에게도 드디어 ‘임산부가 먹고 싶은 것 구해오기 미션’이 생겼다며 좋아하며 뛰어나갔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이 행복해하는 남편을 볼 때면 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았다.



남편이 로망의 미션을 받고 좋아한 것처럼 나도 로망의 임산부 수첩을 받고 기뻐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임산부 수첩인가요?”

숨길 수 없는 순수한 감정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서 간호사는 나를 보고 웃었었다.


병원에 가는 날마다 황홀함을 느꼈다. 초음파 속 작은 점이 꼬마곰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생명의 탄생 과정을 보면서 내가 우주를 품은 듯 경이로웠다.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임신을 알게 되면서부터 매일 비싼 과일과 특식을 먹었다. 산책길에 작은 돌부리라도 보이면 남편의 호위 경호를 받으며 지나갔다.

임신 기간 입덧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아기가 자라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입덧 중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음식과 선물을 보내주며 신경을 써주었고, 임신하는 동안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며 먹고 자는 일만 하는 대한민국 공주로 살았었다.



임신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이전 05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