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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oje 주제 Oct 24. 2021

그토록 소란스러운 평화 속에서

주제 in 인도 그림 여행기 - 갠지스를 품은 도시 바라나시




소란스럽고도 평화로운 바라나시의 낮.



   가트에 앉아서 멍을 때리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심심할 틈도 없이 인도인들이 다가온다. 짜이 한 잔 하겠냐는 건 약과고, 보트를 타지 않겠냐, 요가 배울 생각은 없냐 등 온갖 호객을 하는 것이다. 사실 간만의 혼자 여행이다보니 그런 관심아닌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하루에 같은 친구에게 3번의 요가 권유를 받았을 땐 비로소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어느 날은 한국인 친구가 말을 건 적이 있었는데 숙소를 물으며 혹시 저녁에 다 같이 밥 먹겠냐는 제안을 해줬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그날 타이밍이 안맞아 다시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고 저녁 식사는 불발됐다. 사실 그는 나중에 여름 인도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지효였다. 원래도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인 나는 특히 너무나 기억하기 쉬웠던 지효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일단 그는 누가 봐도 '바라나시 인싸'였는데, 가트에 있다보면 인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건 물론 한국인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난 그와 친해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긴 했었다. 그래서인지 마날리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 혹시 저희 바라나시에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바라나시에서 엮일 뻔했던 인연의 실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더니, 이렇게 여름의 마날리에서 다시 꿰어졌다. 


   나는 이 만남의 우연성조차도 어쩌면 '바라나시라서' 가능했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다니기에 바쁜 여행지와 달리 바라나시는 그저 느긋하게 마치 '살아보듯' 여행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풍경의 요소 하나하나를 더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지효는 내가 매일 지켜보던 그 풍경의 일부였다. 물론 바라나시만의 알 수 없는 특별한 기운이 도와 이 만남의 재성사에 영향을 줬을 거란 조금은 운명론적인 생각도 해본다. 왜냐하면, 그만큼 바라나시의 공기는 독특하리만치 특별했으니까. 정말로 그 공기 속에 숨 쉬며 갠지스의 물결을 보다보면 마음이 사뿐하게 가라앉았다. 그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평화는 오랜만이었다. 그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목욕하는 신자들과 빨래하는 여인들, 장사꾼들로 소음과 활기를 잃을 새가 없다 해도, 그건 분명 평화라 불리워 마땅했다.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갠지스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삼삼오오 모여 놀던 바라나시의 아이들


   사실 바라나시만의 '만남의 우연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가트에서 보트를 운영하는 선재다. 선재는 이름만 들으면 꼭 한국인 같지만 실은 인도 이름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그냥 한국말 잘하는 인도인이다. 선재와 나는 가트에서 짜이를 마시며 한국말 반, 영어 반으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그가 동국대 어학당 출신이라 대학로에서 학교를 나온 나와 활동 반경(?)이 비슷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재는 곧장 대학로 '나누미 떡볶이'가 참 맛있었다는 말을 꺼냈고 나는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대학 시절 내내 즐겨 먹던 분식집 얘기를 인도에서, 그것도 인도인이랑 하게 될 줄이야. 


   이튿날 나는 홀리 축제를 마투라에서 즐기기로 했다며 바라나시를 떠나기로 했다며 선재에게 말했다. 선재는 꽤 강한 어조로 '거긴 시골'이라며 여기서 즐기자고 만류했었다. 그러나 난 떠나고 싶었고,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알자 선재는 바로 기차 예매를 도와주었다. (이로부터 딱 24시간 이후 난 그때 선재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를 하게 된다.)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선재가 하는 멍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와 작별 인사를 했다. 바라나시에서 꼭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리고 그해 여름 델리, 또 다시 인도에 온 나는 어느새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한국인들의 환전소 겸 밥집으로 유명한 와우카페에서 그날 일정을 고민하고 있던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재가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난 깜짝 놀라서 인사를 했는데, 선재도 무척 반가워했지만 놀라울 것도 없다는 투였다. 슬리핑 버스를 타고 델리에 막 도착해 꼴이 말이 아니었던 나와 일행 수정언니에게 선재는 잠시 쉴 수 있는 근처 숙소를 알려줬다. 덕분에 우린 저렴한 가격에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마지막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선재는 이따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며 델리 시내 코넛플레이스의 스타벅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쉽게도 동선과 일정이 엇갈려 그럴 시간은 갖지 못했다. 이렇게 바라나시에서의 재회 기약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이 우연성, 그리고 선재의 '놀라울 것도 없다'는 태도까지 모두 바라나시의 기운만큼이나 신비한 일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만날 줄 알았다는 사람 같았으니까. 


   그러니 난 바라나시만의 독특한 공기가 재회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내 희한한 이론을 믿어보겠다. 온갖 것으로 꽉 차 있으면서도 비어있고, 그토록 시끄럽지만 동시에 평화로운 곳은 아직 바라나시 말고는 못보았으니. 그리고 그 신기한 기운은 분명 뭐라도 이뤄낼 것 같았으니. 바라나시의 신을 믿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떤 장소가 품은 특정한 힘을 말하게 될 때, 난 어김없이 바라나시를 떠올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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