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을 기록하기
"나 때문에 휴학하나?"
대학교 1학년 종강 파티. 나는 아이들에게 이제 다시는 이 학교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름 비장했다. 아이들은 응원과 아유를 동시에 보냈고, 나 역시 질퍽하게 마시며 이에 응수했다. 술자리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어디선가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몇 달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였다. 그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더니, 자기 때문에 휴학하냐며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이런 자기 중심성이 강한 아이를 좋아한 몇 달 전 스스로를 의아해하며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인데'라는 말을 삼켰다. 스무 살의 치기로 나름의 비장함을 감추며 대답했다.
"전혀. 난 다 계획이 있거든."
나는 당시에 전자전기공학부를 다니고 있었고, 반드시 탈출해야 했다.
그렇다. 전 남자친구가 오해할 정도로 내 휴학과 재수는 뜬금없었다. 당연히 가족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다. 국립대라 등록금이 쌌고,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대기업 취직도 거의 보장되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그해 동생이 입시에 큰 성공을 거두며 서울로 갔고, 부모는 멀리 간 아들을 챙기느라 내게 원래 없던 관심이 더 없었다. 당연히 지원도 없었다(동생은 학교 앞에 전세를 구해줬다).
나는 상반기에는 틈틈이 혼자 공부하며 학원비를 벌어, 하반기에 재수학원에 가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과외를 했고, 빈 시간에는 파파이스에서 일했다. 저녁에는 만화 대여점에 갔다.
수익률이 가장 좋은 건 과외였고, 파파이스도 나쁘지 않았다. 비교적 한가한 매장이라 일이 크게 많지 않았고, 최저임금을 정확하게 지키고 초과 수당도 잘 지급했다. 돈만 보면 사실 만화 대여점은 하루빨리 관두는 게 맞았다. 여자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셨는데, 저녁에 아이들을 돌보러 들어가야 해서 몇 시간만 내가 일했다. 당시 내가 받은 금액은 최저 임금에도 한창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돈을 벌려면 과외를 더 구하거나, 파파이스를 더 뛰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었다(사실 다른 거 다 떠나 재수한다고 생각했다면 상관이 있었어야 마땅하나... 철이 없었다. 허허허). 만화책 대여점이야말로, 어릴 때부터 꿈꿔온 나의 꿈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만화책 대여점에 갔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최신작이 가득했다. 손끝으로 책을 훑고, 특유의 매캐한 향을 맡았다. 마음이 부풀었다. 공짜로 이 책들을 다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나 좋던지. 이런 젖과 꿀이 흐르는 알바가 있나라고 기뻐했다. 돈 받으면서 책도 마음껏 보다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깨지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보이는 것과 하는 것은 매우 달랐다.
만화책 대여점 알바의 삶이란, 반납한 책을 꽂고, 새 책을 찾는 사이, 진상 혹은 능글맞은 손님을 끊임없이 웃으며 쳐내야 하는 일이었다(그들은 모두 츄리닝을 입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좁은 매장을 종종 거리며 다니기 바빴다. 만화책의 레일 서가를 열고 닫으며 그들이 빌려 간, 반납한 만화 전집을 꽂고 찾고 바코드를 찍고 담았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또 왔고, 꽂고 찾고 찍고 담기를 반복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만화책은 한 두 권은 가볍지만 전집은 (보통 그렇게 빌렸다) 벽돌 같았다. 하루 이틀은 괜찮지만, 매일매일이 쌓이니 금방 녹초가 됐다(도대체 공부는 언제 했을까... 허허허).
*
마을 도서관이 생긴 지 거의 10년. 초기에 기증받은 책부터 새 책까지. 현재 우리 도서관이 보유 중인 책은 약 6000권에 이른다. 책장이 너무 빡빡하다. 일반 도서관에서 빌리기 힘든 책들이 그 빽빽한 서가에 갇혀 숨을 못 쉰다. 사람들도 그들을 찾지 못한다. 솔루션이 필요하다.
첫 번째 생각은 '레일 서가'였다. 앞뒤로 서가를 늘리면 어떨까. 그 옛날 만화책 대여점 같은 서가를 꿈꿨다. 그러나 대략 알아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고, 설치 자체가 쉽지 않다. 벽과 천장을 연결해야 한다는데, 창고였다가 도서관이 된 이곳은 그런 고급 서가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
두 번째는 현재 서가를 증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책장이 사방으로 꽉 차 있다. 위로 늘린다면 창문을 가릴 것이고, 그나마 있는 여유 공간까지 책장을 채우면 너무 답답할 것 같다.
'
그때, 발상의 전환이 찾아왔다. 서가를 늘릴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 책 비우기였다.
*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오래된 책은 버리자. 그리고 잘 안 보지만 좋은 책들과 복본은 보존서가 개념으로 책장을 다시 마련하자. 처음에는 몇 시간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 보니 이게 이게 쉽지 않았다.
일단 책을 다 찾고, 다시 등록을 하고, 다시 테이핑을 하고, 다시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책은 어찌나 요물인지. 한두 권 볼 때는 너무 좋지만, 옮길 때는 너무 무겁고, 책장은 또 금방 차는데, 빼면 또 많고.
토요일에 8명이 나와 김밥을 시켜 먹으며 늦게까지 일했지만 결국 반의반도 못했다.
*
토요일 밤 도서관 일을 끝내고 앉아, 방송 원고를 수정했다. 원고를 대략 마무리하고 보니 새벽 2시. 무거워진 몸을 누이는데 팔다리가 쑤신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 다시 책을 정리하려 도서관으로 가려는데 남편이 어디 가냐고 묻는다.
도서관엔 책 정리한다고 하니, 내 책장을 보더니 '여기부터 하는 게 어때'라고 묻는다. 나는 활짝 웃으며 언젠가 하겠다고 대답한다. 몇 년째 같은 대답이냐는 남편의 외침이 뒤통수를 때린다.
*
도서관 가는 길이 상쾌하다. 어제 비가 온 뒤 쨍한 날씨가 맑다. 오늘은 딱 두 시간만 하고 오자고 다짐한다. 어제도 오늘도 본 도서관 운영진들이 하나 둘 모인다. 우리는 책을 옮기고, 테이핑을 하고, 버릴 책을 고른다. 밖으로 쨍한 여름이 반짝인다. 결국 두 시간은 다섯 시간이 되었지만, 일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팔다리는 좀 쑤시지만, 그래도 괜찮다.
*
버릴 책을 찾다가. 이런 책을 찾았다. 누군가 기증한 책이다. 책 앞에 사인도 있다.
"2012. 3. 17. 토 한 번 읽었다."
'한 권으로 읽는'의 라임을 살렸음이 분명한, 당당한 기록(혹은 낙서)이 어찌나 재미있고 사랑스럽던지.
지금 우리가 마을 도서관에서 함께 하고 있는 서가 정리도 이런 마음과 다르지 않다. 큰돈을 들여 레일 서가를 멋지게 넣거나, 고급 책장을 들이는 대신, 한 번 책을 읽고 그게 너무 자랑스러워 책 표지에 당당하게 기록하고 사인하는 마음 같은 것.
어설퍼도, 부족해도, 그래서 옮겼던 책을 또 옮기고, 안 버려야 할 책을 버렸다가 다시 찾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어쨌든 책장은 비워지고 있고, 도서관은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은 여유가 생기고 있다. 빽빽하게 꽂혀있던 책들 위로 여름의 바람이 채워진다.
*
그렇게 일요일 저녁 이 시간, 서가 비우기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월화는 긴급 휴관 결정을 내렸다. 세상에 '쉽고 간단한 방법'이란 없다. 그 시절, 내가 EBS 수능 특강을 보는 대신, 만화책 전집을 꽂고, 찾고, 담다가, 전 남자친구에게 당당하게 말했던 "계획이 있어!"를 제대로 못 지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것처럼(그러나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전자과를 탈출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나 혼자는 못한다. 여러 사람이 시간 되는 대로 나와서 돕고,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음에 한다. 그렇게 마을 도서관에서 우리는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쌓고 있다.
*
일요일에도 내 패턴은 반복됐다. 책 정리를 하고 다시 급하게 돌아와, 원고를 수정했다. 아직 다 못했다. 그래서 원래 이 글도 안 쓰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얼기설기 기록한다. 이런 기록과 시간도 다 나의 <어쩌다 관장>의 기록이니까.
여름이었다.
PS) 그리고 결혼기념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