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번외] 마을 기록을 왜 하지?

-아무도 안 시킨 연재를 하는 이유

by 은작

어느 날, 중2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번 주에 우리 마을에서 야시장 하잖아? 그래서 내가 우리 마을에 야시장 한다고 반 친구들한테 말했거든. 그랬더니 애들이 묻더라. ‘왜 너희 동네 애들만 동네를 마을이라고 불러?’라고.”
“어?... 그런가? 그럼 딴 애들은 자기 동네를 뭐라고 부르는데?”
“그냥 ‘00 아파트’라고 하던데? (잠깐 뜸을 들이다가) 그러고 보니 진짜, 우리 동네 애들만 마을이라고 부르네!”


그 말을 들은 순간,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을이라는 말. 소박하고 다정한 그 말이 아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나는 어땠을. 돌아보니, 나는 어릴 적 동네를 마을이라 부른 적이 없다. 아니, 그 말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대구의 골목 안 양옥집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부터 대학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 없다. 우리 집은 골목에 있는 이불가게였고, 360일 문을 열었다(365일이라고 썼다가 그래도 5일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라고 추정되어 고쳤다). ‘이불집 셋째 딸’은 나를 부르는 이름이자, 내 존재의 대부분이었다.

재개발로 어쩔 수 없이 동네를 떠난, 엄마는 여전히 그 동네를 좋아하신다. 반찬을 나눠 먹고, 서로의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이웃들이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답답했다. 작은 일 하나도 금세 온 동네에 소문이 돌았고, 내 말과 행동은 언제나 ‘우리 집 딸’이라는 이름 아래 회자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였다. 아주머니 세 분이 나와 등을 맞대고 아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감고 있었는데,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그 이불집 셋째 딸이 미국에 있는 남자를 만난다고?"
"응. 그렇다고."
"아이고, 좋네."
"그 남자가 그리 똑똑하다며?"
"그 딸내미도 그리 예쁘다던데?"
"이제 미국 가서 사는 건가?"
"시어머니도 없고. 좋지!"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샴푸를 하는 척하며 고개를 최대한 숙인다. 하긴 '그리 예쁘지 않은' 나를 알아보실리는 없겠지. 슬쩍 거울로 보니, 모르는 분들이다. 동네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아들이 있고, 그 아들과 메일을 주고받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삽시간에 나는 미국으로 시집까지 가게 됐다. 그들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지고 있는지를 너무 잘 알았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내가 아닌 ‘우리 집 딸’로만 존재했다. 동네는 따뜻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환대’ 받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

환대의 언어, ‘마을’

몇십 년이 지나, 나의 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동네를 ‘우리 마을’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그저 말버릇인 줄 알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에는 관계의 온도가 있었다. ‘마을’이라 부를 수 있는 건,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내가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는가, 내가 주체로 존재하고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김현경은『사람, 장소, 환대』에서 '절대적 환대'를 말한다. 사회 속에서 '사람'이 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자리, 장소를 부여받고 사회 성원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조건적인 환대다.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 절대적 환대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건, 바로 그 절대적인 환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나는 어릴 적 그 동네에 분명 오래 살았지만,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나를 설명하는 말은 늘 가족의 이름이나 집안의 배경이었다. 이웃과의 인사는 어색했고, 대화는 드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보다, 나와 관련된 ‘정보’만이 중요했다. 나는 그곳에서 한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했다.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내 아이는 조금 다르다. 공동육아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이는 어른들과 제법 진지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름을 불러주는 관계,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 함께 시간을 보낸 경험이 아이의 기억에 켜켜이 쌓여 있다. 물론 어른들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었을 테지만, 적어도 아이는 '지워진 나'로 자라진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동네를 가리키며, 주저 없이 ‘우리 마을’이라 부른다. 그 안에 자기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

마을기록, 환대를 실천하는 방법

나는 ‘마을 기록’ 활동을 해왔다. 골목 사람을 인터뷰하고, 마을의 이야기를 썼다. 강의도 주기적으로 나가고 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3년 연속 마을기록 수업을 했었다. 아이들은 오며 가며 스쳐 지나던 동네 가게에 찾아가 인사를 건넸고, 서툰 말로 질문을 던졌고, 그 이야기를 글이나 시로 옮겨 적었다. 시작은 늘 쭈뼛거림이었다. 결과물은 어설펐지만, 과정은 특별했다.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새로운 감각을 배웠다. 평소 보지 못하던 존재를 보게 되었고, 이름 없는 시간을 의미 있는 기록으로 바꿔냈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마을기록의 가장 큰 힘은 거기에 있다. 기록은 환대의 방식이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남기는 일은 단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나를 둘러싼 공간을 다시 바라보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나의 자리를 새롭게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쓴다. <어쩌다 관장>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미리미리 좀 쓰면 좋으련만, 매주 일요일 벼락치기처럼 겨우 쓴다. 오늘도 그렇게 개학 전날 밀린 방학 숙제를 하듯 했다. 어쨌든 이번 주에도 썼다. 누군가의 요청으로 하는 강의도 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어 쓰는 글도 있다. 다르지만 닮았다. 결국 둘 다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관계로 기억되고 싶은가. 글은 그 답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마을이란 말은 결코 낡은 말이 아니다. 멈춰있는 말도 아니다. 그건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언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가 ‘우리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말 한마디 안에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시간과 신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위에서 언급한 중학교 수업은 오마이뉴스에서 실렸다. 과하게 웃고 있는 내가 보인다. 허허허.

https://omn.kr/20by6


-------------

추신)

나는 왜 이런 글을 갑자기 썼을까. 뜬금없다. 그래서 [번외]라고 붙였다. 앞에 쓴 것처럼 벼락치기로 매일 일요일 연재를 한다. 솔직히, 갈등한다. 누워서 넷플릭스나 볼까, 책을 읽을까 하는 유혹이 매번 든다. 대단히 잘 쓴 글도 아니다. 지난주 글은 괴로워서 보기도 싫다(실제로 안 본다. 강의에서는 퇴고를 계속하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쓰기 쉬운 것도 아니다. 모든 글은 어려우니까. 그래서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왜 쓰고 있지? 왜? 왜?? 그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답을 찾았을까? 허허허. 사실 답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 과정에서 이번 주도 또 썼다. 됐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일수 도장 찍듯, 쓰는 것에 의의를 둔다. 오늘도 이렇게 근근하게 한 주를 이어간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6화[소만]1_내일은 푸르게 푸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