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도서관에서 받은 '오배송된 편지'
도서관 관장직을 맡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목탁 주문'이었다(연재 1화 링크 참고).
그렇게라도 화(?)를 풀어야 했다. 두드려야 했다. 그렇게 나의 관장직이 시작된 지 몇 달. 예상외로 나는 너무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두둥)?
* <목탁 글은 이것이다>
https://brunch.co.kr/@fullmoonmind/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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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북피크닉은 3주 연속이었다. 띠지 만들기, 표지 그리고에 이어 마지막 주에는 아이들 시 쓰기 공모전을 열었다. 주제는 여름 그리고 '입하'와 '소만'이라는 절기였다. 시 쓰기 기획을 하긴 했지만, 내심 걱정했다.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싫어하지 않을까. 응모작이 너무 적지 않을까.
그러나 반전이었다. 어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응모작이 쏟아(?) 졌다. 책 읽고, 한 줄 쓰기도 버겁다고 안 하던 아이들이 너무나 가뿐한 얼굴로 '시쯤이야'하며 써 내려갔다. 곱게 올라간 눈썹에서
, 씰룩 거리는 입술에서 시가 툭, 툭 종이 위로 떨어졌다. 가볍게, 부담 없이, 청량하게 자신의 언어를 뽐냈다. 원래는 수상작을 6명만 뽑으려 했는데, 응모작이 너무 많고, 좋은 작품도 너무 많아 무려 10명으로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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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장마철의 슬픔, 목욕탕에서 요구르트를 공짜로 먹는 기쁨, 수건을 잘 찾는 엄마를 보는 놀라움.'
일상의 자잘한 감정들이 각자의 언어로 새겨졌다. 도서관에 앉아 아이들을 쓴 시를 읽는데, 7살 아이가 쓴 선풍기가 돌아가는 묘사 소리처럼 '웅웅왱왱' 마음이 팽그르르 기쁘게 돌았다. 제철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상큼하다. 여름 맛이 제대로다.
함께 북피크닉을 준비했던 어른들은 아이들의 시를 둘러싸고 머리를 맞대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매달 할까?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더 잘 놀게 뭘 해볼 수 있을까? 3주 연속하다 보니 안 오던 애들도 오는데 더 오게 할 방법은 없을까?"
매번 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또 대가 없이 일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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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라는 책에서는 증여를 이렇게 말한다. '등가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시장 경제라는 체제 속에 무수히 존재하는 무수한 '빈틈'이 증여(p250)라고. 증여는 '오배송된 편지'와 같아서, 발신인은 어디로 갈지도 모를 선의를 그냥 보내고, 수취인은 여기 있는지도 몰랐던 그것을 나중에 읽게 된다고 말한다. 탁월한 비유가 아닌가? 사실상 나약한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인의 증여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편지(증여)는 이미 사방에 도착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상태나 마음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다. 그래서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증여는 '내가 증여했다'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증여를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출현할 때 생성된다."(p108)라고도 말했다.
아이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존재다. 아이들은 도서관에 그냥 왔다가, 그냥 썼다. 어른들 보라고 쓴 게 아니다. 고로 발신인은 발신한 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취인인 나는, 그 시를 통해 무엇인가를 ‘받고’ 있다. 선물처럼 느껴졌다. 포장지도 없고, 감사도 없지만, 확실히 나를 건드리는 어떤 마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이런 게 증여구나. 나는 도서관에서 이걸 받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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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처음 ‘뽑기’로 관장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오배송된 편지를 읽을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다. ‘등가교환’의 원리에 따라 해야 할 것과 받을 수 없는 것을 매일 계산했다. 억울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손해 본다는 마음이 겹쳐 괴로웠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힘들지 않단 말이 아니다. 곳곳에 이미 도착해 있는 증여라는 편지가 있다는 말이다. 전임 관장님들이, 지나가던 마을 주민들이, 운영진이, 아이들이, 심지어 과거의 내가 보낸—보낸 줄도 몰랐던—작고 따뜻한 편지들이 도서관에 있었다.
마을 도서관은 특수한 공간이다. 자본주의의 자기장에서 다소 비켜서 있고, 누군가의 마음 나눔 없이는 돌아가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 틈으로 편지들이 자주, 조용히 도착한다.
책이 빽빽하게 꽂히지 않아도 좋은 틈, 테이블 회전율 대신 사람이 비는 시간이 존중되는 틈, 아이들이 아무 말이나 흘리고 가도 시가 되는 틈. 그게 도서관이다. 나는 그 마을 도서관에서 어쩔 수 없이 머무르다, 자꾸 그 편지를 받는다. 문득 감동하고, 문득 고무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게 찾아오는 이 말들이나 감정은 늦게 ‘발견’된 것이다. 무의식 중에 발송되고, 오래 걸려 도착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더 정확하게 진심이다.
말없이 이루어지는 주고받음. 포장지 없이 건너온 선물들. 도서관은 그런 증여가 자주, 조용히 일어나는 장소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무도 인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건드리고, 건네고, 조금씩 바꾸며 살아간다. 그걸 알게 되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내가 요즘 목탁을 잘 두드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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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_ 다음 편 예고>
하지만 증여는 ‘받는 이의 자세’가 좋을 때만 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좋다고 썼지만, 곧 목탁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뻔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깜냥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그럴 땐 그냥, ‘증여(편지)’ 보물 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었다.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