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에게, 별로부터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간혹 곤란했던 것 중 하나가 등하교 시간의 마주침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오다 보면 누군가가 마주치거나, 혹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었다. 그들은 가볍지만, 어딘가 묵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차 한잔할 수 있어?"
차 한잔은 결코, 차한잔으로 끝나지 않았다. 점심을 지나 하원까지 이야기는 이어졌다. 어떤 이야기는 절실했다. 그럴 때면 나도 마음을 나눴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경우는 그냥 지금이 무료하거나, 답답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었다. 떠도는 소문과 타인의 삶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물론 나 역시 그럴 때가 있었다. 육아를 한다는 건, 한없이 바쁘면서 또 한없이 외로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루를 보낸 날은 아이를 데려오는 하원 길에 괜스레 마음이 뾰족해지곤 했다. 마음이 공갈빵 같았다. 헛헛했다. 그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기보다 다만,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부서지는 말이 아니라, 채워지는 말을. 타인을 향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울리는 말을.
*
하지 무렵, 하루는 유난히 길다. 새벽 5시(물론 나는 자고 있지만, 많은 이렇게 증언한다)에 이미 해는 떠올라 있고, 저녁 8시가 가까워도 아직 환하다. 그즈음, 도서관에서 특별한 강의가 열렸다. <그림책 테라피>다. 특강 진행을 맡아 주신 건 그림책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강이랑 작가님. 몇 년 전 수원 <돌멩이 수프>에서 소개받아 그림책 특강을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강의가 너무 좋아, 아직도 그 수업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이번에 기회를 만들어 특별히 섭외했다. 작가님에게 강의 요청을 드리며, 준비할 것이 없냐고 물었다. 딱히 필요한 건 없고, 둥글게 마주 앉게 책상 배치를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삼십 분 일찍 나와 도서관의 창문을 활짝 연다. 맑고 청량한 여름 기운이, 밤새 갇혀있던 묵묵함을 밀어낸다. 앞만 보고 있던 책상을 돌려 마주 보게 만들고, 작은 접시에 소소한 간식들을 담는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다. 오늘의 준비물은 '편안한 마음과 텀블러'. 각자 가지고 온 텀블러에 커피, 차를 담고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본격적인 수업 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스스로가 지은 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일이다. 그냥 수업만 듣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킬 줄 몰랐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다들 능변이다. 스스로가 명명한 자기 이름을 말했다. 오늘 즉석에서 탄생한 이름도 있고, 오랫동안 써온 이름도 있고, 본명을 그대로 쓰기도 한다. 나는 그 새로운 이름들을 노트에 가만히 써본다. 이름만 들어도, 어쩐지 그들이 보이는 것 같다. 누가 준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나의 이름이니까.
그림책을 잘 모르는 나는, 강이랑 작가님이 읽어주는 이야기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이미 읽은 책도 완전히 새롭다. 장면 장면에 다른 이야기가 겹친다. 작은 색이나 장면, 문장 하나의 울림이 달라진다. 놀랍고, 반갑다. 그런데 이 힘은 여럿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더 커진다. 각자가 인상 깊은 장면을 꼽고,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 이야기 속에 열매가 영글듯 각자의 속내가 툭, 터지듯 나온다. 가끔은 마음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웃고 운다. 그렇게 두 시간을 꽉 채운 수업이 끝나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안녕달 작가님의 『별에게』를 할 때였다. 그림과 글이 어찌나 맑고, 따뜻하고, 아련한지. 물먹은 솜처럼 자꾸 툭, 툭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하나둘 자기 이야기를 내놓는 사람들의 언어가 나를 슬며시 건드렸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잘 참는 사람. 슬픈 장면에서도 울기보다 웃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쉽게 먹먹해진다. 갱년기라는 말로 모든 걸 뭉뚱그리고 싶지 않은데, 딱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먹먹함이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들이 내놓는 이야기가 참으로 묵직했다. 내용이 무거웠다는 뜻이 아니다. 각자의 단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라 그랬다.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의 관심이 아니라, 나의 마음, 나의 삶, 나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시간이 얼마나 묵직한지. 도서관이라서, 그림책이라서, 좋은 선생님이 계셔서 가능한 시간이었다.
『별에게』 이야기를 나눌 때,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말고, 다른 장면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것도 진실이다. 그렇지만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 이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뭉클하지만, 내게 더 와닿았던 건 아이가 7살 무렵,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주말 세월호 추모 행사에 아이들과 같이 다녀온 뒤, 등원하던 길이었다. 늦어서 빨리 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내게 아이가 갑자기 말했었다.
"엄마, 내가 하늘에 별이 되면 어떡하지?"
그 말은 현실에서 종종거리던 내 발을 잡아 세웠다. 아이는 연달아 말했다.
"생각하면 슬퍼서 눈물이 나. 엄마도 못 만나고, 엄마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거 아니야."
나는 서둘며 끌던 손을 멈추고, 몸을 낮춰 아이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목이 메어 겨우 말을 꺼냈다.
"엄마가 왜 몰라. 언제나, 어디서나 딱 보면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그래? (...) 엄마. 그럼, 하늘에서 가장 노오~란 별을 찾아. 가장 밝게 빛나는. 그럼 내가 반짝이며 엄마에게 인사할게. 엄마도 내 이름 부르며 인사해 줘. 그럼 내가 작게 대답할게. '엄마 안녕~' 그리고 내가 안 반짝이잖아. 그때는 내가 자는 거야."
* 내가 이 에피소드를 이렇게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하 건, 이날 바로 기록했기 때문이고, 또 이 기록을 바탕으로 글을 한 편 썼기 때문이다. 그 글은 지금은 절판된 책, 『차마 하지 못한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수록되어 있다.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을 말했고, 별이란 비유를 들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별.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의 먹먹함이 생생하다. 사랑하는 존재가 '별'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 그 느낌은 필연적으로 세월호로 이어지고, 나는 홀로 먹먹해진다.
『별에게』는 한순간에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단지, 책의 힘만은 아니었다. 그날 각자가 털어놓은 '별의 마음'이 나에게 왔다. 채워졌다. 만약 다른 곳에서, 모여 앉았더라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그 자리에서 쏟아졌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책을 통과하며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이 관계가 영원하거나, 이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절대 진리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찰나의 순간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이 '마을 도서관'이라는 뜻이다. 다른 자리라면 절대 내놓지 않을 마음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도서관에서 우리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을 책을 통해, 타인을 통해 만난다.
삶에 도서관을 들인다는 건, 그런 일이다. 어쩌다 관장이 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관장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앞으로도 모를 것 같아, 가끔 걱정되기도 한다. 무엇을 해야 ‘잘하고 있다’는 걸까, 막막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이 도서관에서 나눈 시간은 모두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것. 나는 기억한다. 담는다. 책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연 그 순간들을. 그 기억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도서관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굴러갈 것이다.
별에게 보내는 마음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