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장, 행정 업무 그리고 인격 함양의 기회
은행 문은 정확히 오후 4시에 닫혔다. 유리문 위로 조용히 내려오는 회색 가림막이 근엄했다.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우리가 있었다. 창구 직원들과 나, 그리고 노인정 회장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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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도착한 시간은 2시 45분. 집에서는 일찍 출발했는데, 주차 자리를 못 찾아 한참 헤맸다. 은행문을 열자, 제복을 입은 직원분이 친절하게 방문 이유를 묻는다.
"아... 제가 마을 도서관 관장인데요. 이번에 대표가 바뀌어서요. 이 통장 명의 변경과 OTP를 새롭게 발급받아야 하는데요...."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할 일인가 싶은데, 또 짧게 할 방법을 모르겠다. 말이 길다. 숨이 찬다. 모든 걸 이미 다 아는 듯한 표정의 직원은 번호표를 쥐여주며 나를 구조하듯 웃는다.
대기 인원은 세 명. 생각보다 많지 않다. 괜찮다. 은행에 올 때는 마음을 넉넉하게 먹어야 한다. 작년에는 동 대표였던 나는, 명의 변경 건으로 은행을 이틀 내리 드나든 경험이 있다. 사람은 경험으로 성숙해진다. 적어도 은행 업무에 대해서는.
대기 의자에 앉아 앞 번호를 스캔한다. 나이 드신 남자분이 두 분, 비교적 젊은 여성분이 한 분이다. 나는 책을 펴든다.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달랜다. '에어컨 잘 나오고, 책도 보잖아. 괜찮아. 그럼 됐지 뭐.'
그때, 갑자기 기다리던 어르신 한 분이 벌떡 일어나신다. “다음에 올게요.” 나가는 어르신의 뒤통수에 감사함을 더해, 그의 건강과 안녕까지 빈다. 다음 번호가 울린다. 젊은 여성이 일어난다. 눈은 책이나, 귀는 창구를 향한다. 단순 업무로 천 원짜리만 바꿔간다. 기적이다. 책 50페이지도 못 넘겼는데, 내 번호가 울렸다.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예감이 좋다.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 온 서류를 줄줄이 내민다. 고유번호증, 정관, (관장 선출 기록이 적힌) 회의록, 신분증, 도장 등이다. 직원은 친절하고 꼼꼼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업무 진도가 안 나간다. 갸웃거리던 그가 나를 본다. 아, 이거 불안하다.
"고유번호증 원본 맞으세요?”
“홈택스에서 다운로드해 뽑았는데요.”
그녀는 조용히 여러 곳에 전화를 건다. 시계는 3시 20분. 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10분쯤 후, 그녀가 고개를 든다.
“이 서류로는 안 돼요. 다행히 여기가 시청 지점이니, 옆 민원실 가서 다른 걸 뽑아오세요.”
이렇게 나의 30분이 그냥 사라졌다. 자, 다시 시작이다. 당황하지 말자. 얼른 하자. 스스로를 토닥인다. 인격 함양의 기회로 삼자. 은행은 일분 차이로 한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달린다. 민원 창구로. 그러나 여기가 아니란다. 여권 민원과란다. 다시 경보하듯 빨리 간다. 번호표를 뽑아 3번 창구로 간다. 아니란다. 1번이란다. 1번으로 간다. 젊은 남자 공무원이 기계적인 음색으로 몇 가지를 묻는다. 신분증을 받아 가더니 금방 서류를 떼준다. 나는 다시 은행으로 간다.
이제 시계는 3시 40분. 대기실에 다시 앉았다. 은행은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 불안해서 물어보니 4시 전에 들어왔기 때문에 업무는 다 봐준다고 한다. 다시 '딩동' 소리가 들리고, 모든 것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시계는 이미 4시를 넘었다. 집 떠난 지 1시간 반이 지났지만, 아직 하나도 된 것이 없다.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돌리다 흠칫 놀랐다. 내 뒤로도 4명이 대기 의자에 앉아있다. 그들은 은행은 '원래, 그렇지'라는 모드를 장착하고, 아주 편안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며 앉아 있다. 그래, 맞다. 은행은 원래 이런 곳이다.
처음 내 서류를 봐줬던 창구는 어르신이 앉아있다. 나는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가 다시 떼온 서류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이해가 됐다. 마감시간에 이 귀찮고 복잡한 업무라니.
서류 작업은 지난했고, 길었다. 직원의 모니터 안에서는 수많은 서류 체크가 이뤄지고 있을 것이나, 나는 모른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복사하고 체크하고 간간이 내게 동의와 서명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금융이니가 꼼꼼한 체크는 필요할 것이다. 그가 검토하고 체크하고 있는 그 서류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요즘 같은 시대'에 '이게 최선일까?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자동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은행 안에 '내 마음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이게 이렇게 필요한 일이야? 이렇게 쓸데없는 게 필요한 일이냐고?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근원지는 옆자리. 나와 운명을 함께 하던 어르신이었다. 그는 노인정 회장이었고, 나와 같은 처지로 그 자리에 앉아, 나와 같은 처지로 서류를 내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원과에 가서 서류를 보완할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뭔가가 더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1시간가량을 나란히 앉아 있었고, 결국 폭발한 그의 목소리가 은행을 울렸다.
이해도 됐다.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특히 여성) 직원들을 향한 날 선 말투나 행동은 분명 불편했다. 직원들은 이게 일상이라는 듯,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참 마음의 소리를 외치다가, 여기저기 전화도 하던 노인정 회장은 결국 내일 다시 오라는 통보를 받고, 쓸쓸하게 물러났다.
그 사이에도 나의 서류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대기 의자에는 최후의 1인만이 남아있었다(다른 대기자들은 대출 팀에서 처리를 해줬다).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리고 있던 그의 표정이 궁금해 힐끗 봤다. 그도 마음의 소리를 지를 것인가? 포효할까? 약간의 기대마저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주 평온했다. 그러다 그를 부르는 벨 소리에, 마치 지금 바로 은행에 들어온 사람 마냥 산뜻한 발걸음으로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직원을 대하는 태도나 목소리에도 평정심이 가득했다. 그는 몇 가지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고 한 20분 정도 만에 자리를 떴다(그렇다. 노인정 회장이 왔다 포효하고 가고, 평온한 그가 왔다가는 동안 나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직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시는지 묻자 그는 '목수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업무는 곧 마무리되는 듯했다. 단, 20분의 업무를 보기 위해 대충 봐도 1시간 30분 정도 기다리면서도, 시종일관 평온한 사람!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사실 벌떡 일어나 그에게 어디서 공방을 하시는지 묻고 싶었다(도서관 수납장을 새로 짜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이렇게 평온하고 차분한 사람이라면, 정말 아름답고 따뜻한 걸 만들어 낼 것 같았다. 그에게 연락처를 물으려고 머뭇거리던 찰나, 직원이 나를 불렀다.
"자, 여기 여기 동의하고, 저기 저기 사인해 주시고, 여기 여기 체크해 주세요."
내가 허둥지둥 사인을 하는 사이, 도인 같은 표정과 자세를 한 목수 사장님은 표표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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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난 시각은 오후 5시 30분. 나는 주차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원래 두 시간인데 특별히 더 넣어드릴게요”라며 은혜를 베푸는 듯 시간을 넣었다. 나는 속으로 ‘그럴 거면 서류는 두 시간 안에 처리해 주셨어야죠…’라는 말을 꿀꺽 삼키고 (다소 비굴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문제가 있다면 '시스템'이지, 그걸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 나도 목수 사장님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싶었는데. 아마 그건 실패했을 것 같다.
회색 가림막이 다 내려진 은행 문을 민다. 무겁다. 밖의 공기가 텁텁하다. 덥다. 매우 덥다. 그래 이 더위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소서'니까 그런 거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화'때문이 아니다. 허허허. 오랜만에 집에 가서 목탁을 두드려야겠다 다짐한다.
추신)
다음 날, 같은 은행 다른 지점에서 전화가 왔다. 은행 카드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 다시 또 방문하란다. 허허허.
그래! 내가 더운 건 '소서'니까 그런 거다. 내 눈에 흐르는 이건,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아, 역시 인격함양의 길은 멀고, 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