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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 뜨거워도 괜찮아

- 마을 도서관이 만든 그늘이 있으니까

by 은작

토요일 아침 7시 48분. 내 기준으로는 새벽이다.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현관을 지나 몇 걸음 떼자마자 벌써 덥다. 저 멀리 마을 입구에 빨간 고속버스가 보인다. 핸드폰을 본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 단톡방에 “빨리 오세요!”라는 톡이 올라와 있다. 7시 52분. 뛴다. 아니, 뛴다고 ‘생각’하며, 사실은 마음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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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날 탐방 코스는 인왕산 구간이었다. 그렇다. 수묵화에 자주 나오는 보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나오는 그 뾰족한 산이다. 동생이 인왕산 자락에 살고 있어서 가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돌산이라 험했다.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이 날씨에? 지금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대서(大暑)다. 듣기만 해도 등이 뜨끈해진다. 숨만 쉬어도 몸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말린 오징어포가 될 것 같다. 불가능하다. <길 위의 인문학> 운영진과 담당 선생님도 그렇게 판단했다. 다닐 수 있는 코스로 일정을 변경했다.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돈의문 박물관 마을' 코스다. 오호. 갈만하다.


경희궁 전면에 서 있으면 산이 잘 안 보이는데, 경희궁 맞은편 씨티은행 건물에는 이렇게 선명하게 산이 보인다. 신기하다.
더운 날의 <경희궁>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만난 '구보씨'



사실 나는 <길 위의 인문학> 열 번 중 반 정도만 참석했다. 마을에서 강의가 있는 날은 외부 일정이 계속 겹쳤다. 탐방을 나가는 날은 내 기준 새벽 출발이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라고 쓰며 게을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냥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쉬웠다. 게으름만 넘어서면, 배움과 즐거움이 있다. 게다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찔린다. <길 위의 인문학> 팀에게만 맡겨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는 (이름뿐이라고 해도) '관장'인 내가. 아, 역시 이래서 자리가 무섭구나. 마침 평지로 코스도 변경되었으니, 신청한다.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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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는 매끄럽게 달린다. 토요일 이른 아침인데도 도로는 이미 꽉 찼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딜 이렇게 부지런히 다니는 걸까.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구나 싶어서 반성도 된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매일 반성이구나 하고 버스 전용 차선을 쉼 없이 달리는 버스에 실려 생각한다.


우리 마을 도서관은 비영리다. 아파트 입대위에서 소정의 보조금을 받긴 하지만, 큰돈은 아니다. 수많은 사업은 운영진들의 피, 땀, 눈물(이 표현, 과장이 아니다) 덕에 돌아간다.

상반기만 해도 <책 친구>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큰 기둥이 둘이 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협업하는 사업들이 많다. <책 친구>는 매달 세 번(6시간) 수업을 해야 한다. 운영진들이 각 달을 맡아서, 다양한 사업을 해 왔다. 꽃 피는 봄에는 씨앗을 심었고, 봄과 여름의 사이에는 도서관 뜰에서 북 피크닉을 했다. '광복 특집'을 맞아, 아이들을 상대로 보드게임도 했고, 그림책을 가지고 이야기도 나눴다. 이 사업은 11월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또 다른 기둥이 바로 <길 위의 인문학>이다. <길 위의 인문학>은 더 난도가 있다. 상반기, 하반기 두 번 진행되는데 상반기에는 외부 답사가 무려 5번이나 잡혀있다. 운영진은 여러 가지 섭외를 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정산을 하느라 정말 바쁘다. 나는 그 방에 어쩌다 들어가 있긴 하지만,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가끔 '파이팅' 이모티콘을 날리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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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인원은 서른 명 가까이나 된다. 어른이 반, 아이들이 반이다. 매번 참석하는 아이들은 제일 앞에 서서 똑똑한 질문들을 날린다. 오늘은 수첩에 야무지게 질문도 적어왔다.

"왜 오만 원 권은 신사임당인가요? 왜 십 원짜리 애는 다보탑이 있나요? 왜 오백 원짜리는 학인 가요?"

아이의 질문이 날카롭다.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그 옛날 '김민지 괴담'(을 아시는가!)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겠지만, 역사학자이신 강사님의 대답은 그야말로 수려하다. 막힘이 없다. 게다가 다정하고 깊이가 있다. 정말 '길 위의 인문학'이다.



#. 그 옛날, 김민지 괴담.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나온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F%BC%EC%A7%80_%EA%B4%B4%EB%8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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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경복궁 풍경들. 야무진 질문을 하는 멋진 어린이들. 그리고 초록색이 강조된 힙한 나의 백팩이 보이는 사진까지.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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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탐방과 수업이 이어진 뒤, 드디어 상반기 <길 위의 인문학>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날의 주요 인물은 '백석 시인'이다. 언젠가 책 모임에서 읽기로 해서 사둔 『백석 시집』이 떠오른다. 사기만 하고 안 읽었다. 낯설고 어려워서 몇 장 읽다 덮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천천히 읽어주시는 백석의 시 (그리고 이에 영감 받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들으니, 시란 저런 거구나 싶었다. 대단히 심오한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게 시다.

시처럼,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도 그렇다. 고고학 학자나 대단히 어려운 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길'위에 '인문학'이 있다.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어울릴 수 있고, 같이 앉아 윤동주의 시와 현진건의 소설을 읽는다. 경복궁을 함께 거닐며 궁궐 돌이 삐뚤빼뚤한 이유를 듣고, 소설 속 '구보 씨'가 걸었던 길을 같이 걷는다. 이 일상적이면서도 문학적인 프로그램이 가능한 것 역시, '마을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강의실 앞에 나란히 앉은 초등학생들과 뒤에 반짝이는 눈을 지닌 동네 어르신들을 한 프레임에 넣고 보니 새삼 든든하다. 관장이라고 꼭 다 참여하고, 이끌지 않아도 되어서 더 즐겁다. 무책임(이기도 하지만) 해서라기보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렇게 잘한다니... 대단하다. 순간 마음속에 불쑥 ‘도서관뽕’이 차오르며 괜히 뿌듯하다. 혼자 웃는다.


<길 위의 인문학> 도서관 수업 모습. 10살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이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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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곳을 다니지만, 간식에 이렇게 진심인 곳은 처음이에요.”

<길 위의 인문학> 마지막 날. 강사 선생님은 고급 휘낭시에를 드시며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하든지 간식에 진심이다. 누군가는 간식을 사소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소한 게 모이면 거대한 풍경이 된다.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앉아 시를 듣고, 궁궐 돌길을 걸으며, 한 손엔 수첩을, 다른 손엔 천하장사를 쥐고 있는 풍경. 이게 바로 <길 위의 인문학>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대서의 열기 속에서도, 작은 정성이 그늘이 된다. 책이든, 강의든, 산책이든, 그 곁에 놓인 간식 한 접시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환영의 손짓이고, 함께하자는 초대다. 우리는 그늘 아래 모여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걷는다.


더워도 괜찮다. 마을 도서관이 만든 그늘이 우리 곁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늘 한쪽엔 항상 간식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완벽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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