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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마을 기록을 해야 하는 이유 2

- 앞만 보지 말고, 옆을 보자!

by 은작

내가 진짜 ‘공동체’를 처음 체감한 건, 공동육아를 시작하면서였다.

공동육아는 양육자가 조합원이 되어 어린이집 전반에 깊숙이(!) 참여하는 시스템이다. 매달 반 모임을 하고, 돌아가며 청소하고, 각자 홍보니 기술이니 교육이니 부서에 들어가 일을 한다. 맞다. 애 키우러 갔다가, 내가 키움을 당한다.

공동육아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물론 터전마다 조금씩 다르고, 지금은 또 많이 바뀌었겠지만, 이른바 ‘라떼 시절’에는 이랬다). '매일 바깥놀이(산 타기, 모래 놀이 등)하기, 인지교육 안 하기, 사교육(태권도, 피아노 같은 예체능 포함) 안 시키기, 캐릭터 물건 지양하기.'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 바로 모두 별칭을 정하고, 평어(반말)를 쓴다는 것. 평어는 아이와 어른, 선생님까지도 예외 없다. 이 원칙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권위적이지 않은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고, 어른도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신뢰를 쌓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별칭 문화는 아이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강력하다. 갑자기 부장님이나 선배가 ‘수박’ ‘참외’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하면, 관계의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상상해 보라. 허허허(실제로, 자연물이나 먹는 것, 동물들 이름이 많다. 예전에 우리 집에 오기로 한 '파랑새'가 아랫집을 잘 못 눌러서, 인터폰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저예요. 파랑새!' 아... 아랫집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이런 낯선 문화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쉽게 생각한다.

“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굳이 공동육아를 찾아와(나의 경우 1년 기다린 뒤, 면접을 봐 어렵게 들어왔다), 굳이 청소하고, 굳이 어린이집 홍보도 하고, 수리도 하고, 매주 행사도 한다. 거기다 돈도 더 낸다! 맞다. 짐작대로, 이 부모들... 이상하다. 허허허.

공동육아에는 '3년 주기설'이라는 것도 있다. 3년에 한 번, 꼭 크게 조합원들끼리 한판 붙는다는 전설이다. 나도 3년 차에 그 ‘전설의 해’를 체험했다. 시작은 사소했다. 하지만 쌓이고 쌓인 감정이 있었다. 싸움은 들불처럼 번져, 터전을 활활 태웠다. 하원할 때 누구랑 눈 마주쳤는지, 누구랑 인사했는지에 따라 편이 갈렸다. 이 전쟁(?)은 약 6개월간 지속됐다. 그 결과, (물론 졸업자도 있었지만) 반 정도가 터전을 떠났다. 나는 조율하려고 애쓰다가 약 5kg이 빠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땐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과몰입하며 전투 모드였다. 아이들을 담보로 기싸움을 벌였고, 감정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편하고 즐거웠던 터전이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싸움의 끝 무렵에는 전문가까지 불러 화해 자리를 마련했지만, 이미 금이 간, 관계는 회복될 수 없었다.

갈등 초기 가장 많이 나온 말이 있다.

“공동육아가 왜 이래?”

각자가 생각하는 공동육아 상이 있었다. 어떤 이는 ‘힘든 양육자를 더 도와야 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일회용 절대 금지’를 외쳤다. 어떤 이는 선배가 후배를 조금 더 챙겨야 했다고 했다. 각자의 ‘공동육아론’은 달랐고, 그 차이가 어느새 틈이 아닌, 골이 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림자뿐이지만, 그림자를 보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하고, 기록해야 한다.

사실,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공동육아가 왜 이래?'라는 말이 말해주듯,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공동체는 모두 다 다르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처럼 우리는 각자 눈앞의 그림자만 보고 말한다. 그러니까 앞만 보지 말고 서로를 봐야 한다. 물어야 한다. 말해야 한다. 각자의 이데아상(여기서는 공동육아)의 그림자를 꺼내놓고, 비교하고, 조율해야 한다.


이때 동굴 밖의 공동체의 '이데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동굴에 갇힌 우리는 평생 못 본다. 정답은 없다. 그러므로, 퍼즐 조각을 맞추듯 우리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그림자 위에 맺힌 사소한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이번 주 모래놀이하다 생긴 싸움, 지난주 몇 명만 간 키즈카페 모임, 간식을 우리 아이만 못 받은 일' 같은 구체적인 순간에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 질문, 생각, 기록 속에 우리가 진짜 생각하는 공동체가 숨어있다.


그러나, 뭐든 갑자기 하기 어렵다. 계속 앞만 보고 있으면 목이 뻣뻣해진다. 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자주 마주 보고 유연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기록은 단순한 받아쓰기가 아니라, 질문이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연습이 될 수 있다. 사소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결국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왜 이걸 하는가? 이 활동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했을까?'

기록하면 관찰하게 된다. 관찰하면 질문하게 된다.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이해하게 된다. 그 속에 진짜 공동체가 피어난다.


*

<어쩌다, 관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시작한 이후, 나는 도서관에서 더 많이 보고, 더 잘 듣게 되었다.

뭔가 대단한 사명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누가 시키진 않았는데, 매주 연재를 해야 하니까(허허허). 그러나 덕분에 나는 글감을 더 찾는다. 자세히 본다. 그냥 지나가던 일에 의문을 가지고 본다. 묻는다. 듣는다. 그리고 끝내 감응한다. 이해한다. "왜 나만 이렇게 일을 해?" 하고 툴툴대던 나를 멈추게 한 것도, 바로 이 기록의 힘이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은 흩어진다. 하지만 글로 남기려면 곱씹어야 한다. 정제해야 하고, 최소한의 이유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적극적 이해의 과정이다. 공동체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믿는다. 기록을 하면, 공동체는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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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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