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만]1_내일은 푸르게 푸르게

- 비록 오늘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같은 상태일지라도

by 은작


나는 내향인이다. 혼자가 좋다. 지금도 그렇다. 될 수 있으면 혼자 있고 싶다. …라고 생각한 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도서관 안이었다. 북적인다. 시끌시끌하다. 도망가고 싶다. 조용히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이들이 없는 어른 도서관 쪽으로 향한다. 조용한 그곳에서 눈을 돌린다. 책장 맨 앞, 전면을 향한 노란 책 한 권이 시선을 끈다.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가 보인다. 역시, 책은 용하다. 내 마음이 딱 여기 있다.

물론, 이건 평소의 내 생각이 아니다(물론 책 내용도 제목처럼 단순? 하진 않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도서관은 ‘사람이 많은 편이 좋다’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이 와서 재잘거리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갑자기 어두웠던 미래가 조금 밝아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조금 삐딱해졌다. 이게 다 내가 ‘어쩌다, 관장’이기 때문이다.

*

5월, 도서관의 테마는 ‘북 피크닉’이다. 입하와 소만 사이. 여름이 시작되고 초록이 짙어지는 계절에 딱 어울린다. 3주 연속 수요일마다 열린다. 도서관 앞마당부터 안까지 누구든 와서 책을 펼칠 수 있는 책 소풍날이다.

그런데 북피크닉이 열리기 전부터 나는 어쩐지 지쳐버렸다.

아침 9시 <산책과 낭독> 동아리 모임이 있다. 아침 일찍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4대 비극, 『햄릿』을 읽었다. 셰익스피어는 역시다. 막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며 우리를 들었다 놨다 했다. 낭독 모임이 끝난 뒤, 집에 들렀다. 독촉 메일을 보고, 원고 수정을 하다가 시간이 돼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늘은 맑게 개었는데, 몸은 늘어진 수건처럼 축축했고, 마음까지 눅눅했다.


며칠째 날이 쌀쌀했다. 다행히 북 피크닉 날만 되면 기묘하게도 맑게 개었다. 나는 ‘행사 도우미’를 가장했지만, 사실은 ‘살짝 퍼질러 앉은 손님’ 모드였다. 뭔가 좀 삐딱하게 굴고 싶었던 하루였다. 그러다가도 막상 아이들이 밀려올 때는 또 그렇게 못 했다. 도서관에 온 아이들은 반 장 짜리 용지에 이름을 쓰고, 시작 시간을 적는다. 30분간 책을 읽고 한 줄 쓰기를 마쳐야 뽑기를 하고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아이들은 책에 푹 빠졌고, 어떤 아이들은 책 보다 시계를 더 자주 봤다. 맞다. 30분은 긴 시간이다. 평소 같으면 그런 아이 옆에 앉아 이야기하고 책도 권했겠지만, 그날은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란 마음이 들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도서관 안에서 밖을 보니 조용하다. 펼쳐진 돗자리 위로 아무도 없었다. 슬쩍 슬리퍼를 꿰차고 조용한 마당으로 빠져나왔다.


돗자리 3개, 텐트 2개, 캠핑용 의자 여러 개가 놓인 마당. 나는 아무도 없는 의자 하나에 앉아 김금희 작가의 『나의 폴라 일지』를 펼쳤다.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앞 텐트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퍼를 올려 꽉 닫은 텐트 속에 6학년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텐트가 날아갈 것 같아요!"라고 소리치며 들썩들썩한다.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평온한 5월의 오후. 텐트만 진짜 날아갈 듯 흔들렸다. 찌뿌둥했던 마음 한쪽이 슬그머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아이들의 기억엔 그게 또 아주 괜찮은 하루로 남겠구나 싶었다.


도서관 의자에 앉아서 찰칵.



*

이번 주는 유난히 바빴다. ‘어쩌다 관장’이 된 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용을 썼다. 잘하지 못하니까 더 그랬다. 부담스럽지 않게 부담스러웠다.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 나왔다. 원래는 토요일에 책 정리하고 회식을 할 계획이었다. 지난달 회의에서 그렇게 하자고 미리 이야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날이 다가오자 반응들이 영 시원치 않았다. 운영진 방에 독려 글을 몇 번이나 올렸지만, 다들 별말이 없었다. 하다 안 돼서 출석 체크를 올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절반도 안 됐고 못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허탈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구겨졌다. 우연히 만난 분에게 회식에 오라고 했더니, "난 가정이 있어서 주말에는 못 나가요"라는 답이 왔다. ‘여기 가정 없는 사람이 있나요’ 하며 웃으며 농담처럼 넘기려 했지만, 분명히 얼굴이 어딘가 일그러졌을 것이다. 결국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회식은 생략하고, 조용히 책 정리하고 소소한 간식만 먹기로 했다. 그런데 ‘책 정리’란 게 사람을 이렇게 탈진시키는 일이었을 줄이야.


토요일에 시작된 정리는 화요일까지 이어졌다. 수천(?) 권쯤 버리고, 수천(?) 권쯤은 보존 도서로 분류했다. 서가를 옮기고, 라벨링 하고, 다시 옮기고, 또 버리고… 사람들은 요일마다 다르게 나왔지만, 나는 매일 나왔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큰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랬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어쩌다, 관장’이라서. 누구도 보지 않는 '왕관의 무게'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목뒤는 딱딱하게 굳었다. 뒷골이 땅겼다. 그 결과, 오늘 삐딱해졌다.


버리는 수천(?)권의 책 중 일부다. 업자분들이 가져가 시 전에 책 나눔 행사를 했다.



*

도서관 앞마당에는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의 '깔깔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책장을 펼쳤다. 『나의 폴라 일지』 초반부다. 김금희 작가는 남극에 가고 싶어서 제안서를 쓰고 또 썼다고 한다. 추위를 잘 타고, 체력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고. 그 모순되면서도 간절한 마음이 뭐지? 생각하다가 문득 내 안에서도 비슷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은 마음. 관장을 잘하고 싶지만 또 피하고 싶은 마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상태. 설명하긴 어려운 그 마음.

‘관장’이라는 직책이 별 부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 대표 회장’을 내려놓고 나니, ‘어쩌다’보다는 ‘관장’ 쪽에 무게가 자꾸 실렸다. 가볍게 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근데 생각해 보면 다 욕심이다. 왜 내 제안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가.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의지가 부정당한 건 아니지 아니다. 안다. 알면서도 내가 그걸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내 안에 있다. 이제는 정말, 연습이 필요하다. ‘관장’보다 ‘어쩌다’에 방점을 찍는 연습을 하자. 거절당해도 그 거절이 나에 대한 무관심이나 거부가 아니라는 진실에 대한 훈련을 하자. 무엇보다 너무 힘을 빼지 않고 나를 잘 조절해 나가는 탄력성을 기르자. 지금 내게는 그것이 절실하다.


펄럭이는 [소만], 저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노란 텐트'안에서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

심술로 실룩이던 얼굴을 들어 들어보니, 오늘의 북피크닉의 컨셉인 [소만]이 펄럭인다. [소만]은 식물이 푸르게 성장하는 시기다.

도서관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다. 나와는 거리가 있다. 텐트 안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나는 그들과 있지만, 또 있지 않다. 적당한 거리다. 조금 멀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그래, 이렇게 나는 나만의 조용한 북 피크닉을 즐긴다. 배운다. 경험한다. '푸르게 성장한다'. 커간다. 그렇게 '소만이니까, 소만답게' 나만의 관장 연습을 한다.

그렇게 혼자가 좋지만, 혼자이기만 한 건 아닌, 오늘의 도서관에서 나는 한 뼘 성장한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5화[입하] 2_책장을 비우고, 여름을 채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