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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 1_세 번의 북피크닉과 한 번의 회식

- 관장의 의무

by 은작

핸드폰이 울린다. 세무서다. 동 대표 임기가 끝나자마자, 도서관 대표자 명의를 변경하러 갔었다. 서류에 이름이 쓰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동 대표라는 무거운 배낭을 내리려 하자마자, 바퀴도 잘 안 굴러가는 캐리어가 손에 들린 기분이었다. 배낭만큼 직접적인 무게는 아니지만, 부담스럽다.


5월 초, 연휴 직전이었다. 서류는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그렇다. 나는 이제 서류상으로도 완전히 관장이 됐다. 문자를 보니, 내 마음속 캐리어에 돌이 하나 더 얹어진 느낌이다. 과연 이 캐리어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할까? 가는 길이 인천공항 출국장처럼 매끈할까? 아니면 시골길처럼 울퉁불퉁한 여정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안 그래도 습자지처럼 얇은 나의 얄팍한 마음에 가랑비가 내린다. 폭삭 젖을 정도 아니지만, 달리 습자지 마음이겠는가? 금세 눅눅해진다. 구석에 둔 목탁을 꺼내, 한두 번 치고 메시지를 바라보다 캡처한다. 전 관장 K에게 서류가 완료됐다고 알린다. 잠시 후 답이 온다.

"오 축하해요♡♡"

한껏 삐뚤어진 습자지 마음이 반사적으로 답을 보낸다.

"과연... 축하할 일일까요?"

얼마 뒤, K의 메시지가 울린다.

"그럼요. 너무 힘들지 않다면 해보는 거 좋다고 생각해요."

산뜻하고 단단한 대답이다.


*

요즘 나는 한 단체에서 기록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4회 차로 구성된 수업에는 매주 숙제가 있다. 최종 목표는 마을 기록가 양성이지만, 그 이전에 일상 속 글쓰기를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큰 목적이다. 첫 주는 기록의 의미를 다뤘고, 숙제는 사진 한 장에 세 줄 이상 글쓰기. 상대적으로 낮은 난도와 첫 주 효과 덕에 과제 수행률이 매우 높았다.

2회 차는 글쓰기의 기본 관련 강의였다. 역시 숙제도 나갔다. 한 챕터 정도 읽고 그중 마음에 드는 필사와 자기 문장 쓰기였다. 중간에 긴 연휴가 있었고, 1회 차보다는 확실히 어려운 숙제다. 그래서일까. 과제 이행률이 첫 주보다는 훨씬 낮았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습자지 마음답게 슬며시 이런저런 생각이 올라왔다. 너무 어렵게 몰아붙인 걸까. 부담을 드린 걸까. 중간중간 독려 글을 올리면서도 말을 최대한 골랐다. 말이 이상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부담을 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하루하루가 지나자, 밀린 숙제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내가 캡처해서 올린 글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적기도 했고 책을 빌리거나 사서 읽었다는 분도 있었다. 나는 그 하나하나의 글들이 참으로 고맙고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대견했다. 시간을 들여 읽고, 필사하고, 공개적인 장소에 글을 쓰고, 숙제 인증을 한다는 것은 노력과 정성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글이라는 것은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이고, 매일 무언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큰 돌을 들어 옮기는 것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 '돌 옮기'급의 숙제를 낸 이유는,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들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생각만 하면, 바라보기만 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피하기만 하면 절대 돌을 옮길 수 없다. 내 힘으로 돌을 들어보고, 옮겨보고, 안 움직이면 돌에 누워 햇볕이라도 쬐어보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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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뒤, 『아무튼 명언』을 읽는 데 야마다 레이지가 말한 '어른의 의무'가 나왔다. 그가 말한 어른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불평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나보다 앞서 관장을 했던 K는 무려 6년을 했다(놀라운 건 본인은 얼마 전까지도 4년 ‘만’ 했다고 착각했다는 것. 코로나로 뒤엉킨 시간 속에서 어느새 6년이었다). 그동안 도서관은 내 외형적으로 큰 성장을 했다. 창고 같았던 공간을 리모델링했고, 마을 기록 사업을 함께해서 책도 냈다. 수많은 지원 사업과 일상의 도서 업무, 자잘한 행정 처리 등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관장이 있었다. K는 언제나 가볍게 톡, 산책하듯 관장직을 수행했다. 하다 보면 누군가는 문제를 제기하고, 서류는 부족하고, 회의는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그럴 때도 그는 늘 화사하게 웃었다.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산뜻하게 웃으며 뭐가 문제냐며 말간 얼굴로 회의를 다시 중심으로 이끌었다.

명의 변경을 하러 간 날,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직간접 공격이나 불평 등에 유연하게 잘 대처하냐고 물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 사람의 의견일 뿐,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라고 말하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도 잘할 것이라고 토닥였다. 역시, 멋있다. '잘난척하지' 않는 잘난 K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무엇보다 K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 회의 시간에 누군가 자꾸 딴소리를 해도, 청소를 제대로 안 해도,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 해도 유쾌했다. 그랬다. 그렇다. '어른의 의무'와 '관장의 의무'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

습자지 마음을 가진 나는 시작도 전에 징징거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징징거림이 없었다면 이 연재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징징거리다 보면, 어느새 불평과 자만 사이를 오가며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생각이 드니 문득, 날씨에 따라 아들 걱정을 달리하던 동화 속 어머니가 떠오른다. 해가 나면 우산 장수 아들을, 비가 오면 소금 장수 아들을 걱정하던 그 어머니처럼 나도 어리석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


*

3회 차 글쓰기 수업을 마쳤다. 나는 또 새로운 숙제를 냈고, 그 답글들을 기다리고 있다. 마감 전이라 아직 어떤 글이 올라올지 모른다. 기다리며 K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린다. 지금 강의를 듣는 학인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너무 힘들지 않다면,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보니 습자지 마음에 새로운 물이 들었다. 얇아서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가볍게 물들고, 또 쉽게 말릴 수도 있다. 그래, 글쓰기든 관장이든, 대단한 무언가를 하겠다는 마음보다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낫다. 어차피 세상은 비가 오거나, 해가 뜬다. 날씨에는 이유가 없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 굴리기가 아니라, 그냥 캐리어를 끌고 나가보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불평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고,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며’ 무엇이든 해보는 것.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그렇게 나는 저지른다.

그 결과, 5월에는 세 번의 북피크닉과 한 번의 회식(사실은 대청소)이 잡혔다.

그렇다. 온 세상이 생기를 품는 ‘입하’.

바야흐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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