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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그린 Jul 30. 2020

노은님, 내 냉장고를 열고

예술경영 season 1_08

2015년 한 전시장에서 한 작가를 만났다. 미술관 전시를 위한 미팅이었고 좋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 주 주말 가족과 함께 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작가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70세의 작가는 1970년 재독 간호사(흔히 파독이라 하는데 강제로 간 것이 아니라 직접 지원해서 간 것이라 재독이라 해야 맞다)로 23살의 나이에 독일로 갔다.


재독 간호사의 삶을 다룬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술의전당, 2007.


젊은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멀리 타지에서 작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간 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침대 밑에 숨겨두었다. 한국에서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린 적도 없었다.


1972년 침대 밑에 쌓여 있는 그림들을 보고 독일의 간호장이 전시를 하자고 제안했고, 병원회의실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후 미술대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주독야경(낮에 학교가고 밤에 간호일하면서)으로 6년간 미술을 배웠다. 1990년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20년간 재직한다.


바로 화가 노은님(1964-)이다.

새와 나무, 자연 등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는 그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과도 같이 순수하다. 파울 클레의 그림처럼 영혼의 순수함이 그림에 묻어있다.



노은님, <나무 동물들>, 종이에 아크릴 채색, 133 x 168 cm, 2011



작가는 같이 간 내 아내가 화가라고 하니 인생의 선배이자 예술가로서 정말 좋은 말을 해줬다.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다 표현해보라고 했다.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고민하지 말고 다 표현하다보면 나에게 딱 맞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냉장고에 비유하였다.


이것이 바로 노은님이 말하는‘냉장고 이론’이다.

“내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음식과 재료들은 누가 넣어준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넣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 음식과 재료들은 모두 내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저것이 좋은 것이다’를 나눌 필요가 없이 모두가 내 것이다. 내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누가 끄집어 내주기를 바라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내 냉장고 안의 재료를 꺼내어 된장찌개를 끓이든지 스파게티를 만들든 음식을 만들어야 그것이 맛있는 요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듯이 끊임없이 문을 열고 음식들을 넣었다 뺐다 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노은님, <물짐승들짐승>, 캔버스에 혼합재료, 100 x 140cm, 2009


흔히 예술가들이 깊이 고뇌하고 고민하여 작품을 내놓는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길 초입에 서서 너무 많은 고민들을 하고 생각하여 전혀 시도하지 못하고 멈추는 경우도 숱하다.


‘붓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라는 작가의 예술철학이 모두 담겨져 있는 냉장고 이론은 예술가를 떠나 꿈을 꾸고 실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말이다.


내 냉장고의 재료들을 이것저것 꺼내어 김치찌개도 끓여보고, 설렁탕도 만들어보고 하다보면 나에게 맞는 음식과 레시피가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내 가슴 깊숙이 있는 내 열정의 불씨를 끄집어내는 ‘냉장고 이론’은 그렇게 나의 삶에 또 하나의 각인된 새김으로 다가왔다.


노은님, <걸음마>, 종이에 아크릴 채색, 32 x 26cm, 2015


작가의 인생철학이 담긴 조언을 듣고 전시를 보는데 첫째아이가 오랫동안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순수한 열정은 나이를 떠나, 시대를 관통하여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작품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글 | 빨간넥타이 두두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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