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는 여정
괴롭고 불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쩔쩔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럴때면 저는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조언도 구하고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 그 순간만큼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마음이 좀 달래지더군요.
하지만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요.
저의 괴로움이 친구들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할 즈음,
저를 걱정하던 이들의 말끝에서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주변사람들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감정을 쏟아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제는 아무리 감정이 복받쳐도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면 가장 편한 엄마에게 전화하곤 했습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별 얘기도 못하고 오열 하다 전화를 끊은 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엄마도 괴로우신지 제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 마저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골치 아픈 사람이 된 건 아닐까 한없이 초라해졌습니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친구들의 이야깃거리로만 남을 신세 한탄은 이제 그만두고,
스스로 더욱 단단해져서,
남편과 아이들을 오롯이 내 두 어깨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저는,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괜찮다', '잘 지낸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주변에서 남편의 상태나 나의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도,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해서 입을 다물게 되더군요.
그런데 말을 줄이자 이상하게 감정의 진폭도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고통과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무렵, 지인으로부터 유명하다는 역술인을 소개받아 찾아갔습니다.
반신반의하며 찾아갔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제가 묻기도 전에 제가 듣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남편의 중환자실 입퇴원, 전세금 반환 소송과 집 경매, 시가의 이혼소송으로 탈진해 있던 저를 향해,
남편이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며 남편이 죽어야 저와 아이들이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남편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반쯤 넋이 나간 채 살려달라고 달려와 울부짖던 제게는,
“살겠다, 이번에는 남편이 살아난다”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시모와 시부의 사주를 묻더니 남편의 병이 나을 팔자라고도 했습니다.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인 저였지만,
그들이 해주는 한 시간의 운세 풀이는 참으로 시원하고 달콤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괴롭히지 않고도 마음을 달랠 수 있다니 20만 원의 복채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저는 역술인의 몇 마디에 의지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된다’,
‘내년부터는 대운이 들어온단다.’
그 기대 하나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아이를 챙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들은 아무 의미 없이 흩어졌습니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괴로움은 더 짙어졌습니다.
기대가 사라지자, 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저는 또다시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우울은 깊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회사 업무도 제대로 못해내고, 결국 가족의 생계까지 흔들릴 거라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주말이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예약했다가,
도무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취소하길 반복했습니다.
일상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질 때쯤 용기를 내어 정신의학과를 찾아갔고, “그냥 약만 빨리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대기실에 앉았습니다.
진료실에 들어가서는, 역술인처럼 그냥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의사는 저의 상태를 세세히 물어봤죠. '어떤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피곤하고 막막했지만, 말문을 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약을 받기 위해서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야 하는 상황이 더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담당 의사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그다음 진료도 막막했습니다. 괴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또다시 새 의사에게 반복해야 했으니까요.
치료는 종종 중단되었습니다.
불안감과 우울감이 스믈 스믈 올라오면 예전에 처방받아 두었던 약을 먹곤 하다가,
회사에서 공황증상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올 때면 점심시간에 급하게 근처 정신의학과로 뛰어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하는 의사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변화된 근황을 또 전달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너무 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이 버거워졌던 어느 날,
저는 지방의 한 명상센터에 2박 3일 주말 프로그램을 예약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턱끝까지 차올랐던 시점이었습니다..
도착 후 명상 수행법을 교육받고, 이내 숙소를 배정받고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 생전처음 예불이라는 것에 참여했지만, 낯선 남방불교의 종교의식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간단한 예불 후 끊임없는 좌선, 걷기 명상, 침묵의 시간들이 흘러갔습니다.
묵언수행 속에서 휴대폰을 꺼두고
그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오롯이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니 남 탓도, 내 탓도 하지 않게 되더군요.
어떤 판단도 해석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감정과 생각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하루 두 끼만 제공되는 식사였지만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니 배는 고프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공기가 선풍기 바람에 섞여 들어와 잠도 솔솔 왔습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풀냄새, 흙냄새를 느끼며,
고통을 붙들고 있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
그제야 저는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마취된 것처럼 고통에 무뎌지거나,
워커홀릭처럼 업무에 몰입하며 현실을 외면하는 것과 달리,
온전히 현재에 머물면서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막내만 성인으로 키우고
산속에 들어가 살아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지막 날, 수행을 지도해 주신 스님은
“2박 3일은 너무 짧다. 삶으로 돌아가서도 현재에 머물며
기회가 닿는다면 일주일, 한 달 수련에도 도전해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은 계속됐지만,
명상수행의 경험 때문인지, 삶을 대하눈 내 가치관의 변화 때문인지, 괴로움을 바라보는 제 시선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무너질 듯한 순간마다
명상센터의 햇살과 침묵,
그 공간의 호흡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다시 세상의 소음과 속도 속에서 흐트러진 삶을 살고 있지만,
종종,
언제쯤 다시 맑게 깨어날 수 있을까,
달력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