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니는 여느 외할머니와 다름없이 정 많고 다정한 분이셨다. 사십 대 중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로 되셨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사랑을 주셨다. 외갓집에 가면 늘 환영해주셨고 요리를 잘하셔서 늘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차려주셨다.
나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외할머니께 ㅇㅇ이가 이번에는 무슨 상을 받았다고 엄마가 자랑을 하면 "기특하다 우리 손주~"하시며 엉덩이를 토닥여 주시며 자랑스러워하셨다.
외할머니는 1933년생, 올해로 정확하게 90살이 되셨고 나하고는 딱 50살 차이가 난다. 코로나와 둥이 육아로 외할머니를 못 뵌 지 지금 5년 정도가 되긴 했지만 내 기억에 외할머니는 체구는 작으셔도 늘 건강하시고 목소리도 크시며 정정하신 분이었다. 걸음도 빠르시고 길눈도 밝으시며 빠릿빠릿하셨다.
외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셔서 조선인이라고 온갖 차별 속에 자라셨다고 한다. 난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셨다길래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시면서 자라셨나 보다 했는데 오히려 일본인들과 같이 살다 보니 더 차별을 많이 당하신 것 같다. 학교를 다니시긴 했으나 전쟁통이라 학교에서 뭘 배운 건 없고 쇠붙이를 주워오라느니 뭘 구해오라느니.. 무기를 만들 재료들을 구해오라면서 학생들에게까지 물질과 노동을 아낌없이 착취했나 보다. 그렇게 지내다가 해방 이후에 한국에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외할머니와 오빠 한 명만 살아남고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을 다니다가 겨우 정착을 하셨다.
결혼을 해서 스물세 살에 엄마를 낳으셨고 그 뒤로도 아들 둘, 딸 하나를 더 낳으셨다.
그런데 큰아들(나에게는 큰외삼촌)은 대기업을 다니다가 일치감치 사업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뒀고, 불행히도 보증을 잘못 선 데다가 사업도 망해서 여기저기 전국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빈털터리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겨우겨우 돌아와 지금은 외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지만 심한 당뇨로 발이 썩는 등 고생을 하고 있다.
막내아들도 대기업에 다녔다. 그런데 막내아들도 남편(나의 외할아버지)과 같이 사십 대 후반에 췌장암에 걸려서 일찍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막내며느리(나의 작은 외숙모)마저도 췌장암에 걸려서 사십 대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외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기구한 인생이고 너무 고생이 많으셨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에 참 감사했다.
뒤늦게야 외할머니가 나르시시스트인 것을 알긴 했지만 너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셔서 고생을 하신 것을 직접 들으니 이 분께 뭐라고 할 일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땐 나르시시스트가 뭔지를 모르니 '그냥 성격이 불같은 분인데 감추고 계시는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정 많고 자상한 할머니인데 그런 외할머니를 지금에 와서 나르시시스트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엄마와 이모의 말씀을 듣고 나서였다.
외할머니는 사람마다 대하는 모습이 다르신 것 같다.
장녀였던 엄마는 외할머니께 동생들을 잘 못 돌본다는 이유로 어릴 때 혼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모는 셋째 딸인데 엄마가 경제력이 없고 둘째인 큰외삼촌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못 모시고 셋째인 이모가 외할머니를 부양하고 있다.
이모도 학원을 운영하셨었고 이모부가 대기업에 다니셔서 외할머니가 거주할 집도 사주시고 몇십 년째 매달 생활비도 대주고 계신다. 그런데 몇 년 전 이모부가 갑자기 심장이상으로 쓰러지셔서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으셨다. 이모부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계신대도 외할머니가 이모를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모는 엄청 분노하셨다. 그 이야기를 이모에게 듣고 외할머니께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알고 나니 외할머니가 내현적(covert)나르시시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