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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03. 2024

성실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 - 할머니

- 그것들은 성실과 무관하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환갑이었다. 잔치를 해야 하는데 첫 손주가 태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비난과 실망을 담아 이 얘기를 자주 했다. 자신의 환갑잔치와 맞바꾼 손주가 손자가 아니라 손녀인 게 할머니에게는 두고두고 한이었다.


  할머니에게 나는 예쁘긴 한데 마음에 차지 않는 첫 손주였고, 딸만 셋을 낳은 엄마는 죄인이었다. 여자로 태어난 게 내 잘못도, 동생들의 잘못도,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할머니는 대가 끊겼다며 우리를 탓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아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할머니는 유일한 아들인 아빠를 마냥 귀하고 애처롭게 봤다. 심지어 세상에 없는 손주에게도 애틋했다. 태어난 적도 없는 아이의 이름을 고, 대대로 남기겠다는 듯이 손녀들에게 알려주고 또 알려줬다. 내게는 시대를 역행하는 촌스러운 이름이었는데 할머니에게는 간절하게 부르고 싶은 그리움이었다

 

  엄마 말로는 할머니가 나를 엄청 물고 빨았다고 한다. 나를 너무 예뻐해서 한시도 품에서 떼어내지 못했단다. 그런데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추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며 내내 못마땅해하거나,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던 모습이 크게 남아서 할머니에 대한 앙금이 오래갔다. 할머니는 현실성 없는 주관적 기준을 토대로 내게 낭비가 심하다며 궁상을 강요했다. 넘어져서 다친 나를 조심성이 없다며 질타하기도 했다. 여자가 갖춰야 하는 덕목이니,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말을 들을 때면 반발심이 생겼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할머니에게 대드는 횟수가 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내게 심한 양가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아들이 아니라서, 덤벙대서, 물을 함부로 사용해서, 빠릿빠릿하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다가도 나의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좋아했다. 눈이 커서 답답하게 보이지 않다거나, 싹싹한 구석이 있어 사랑을 받을 수 있다거나,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듬직하다거나 등등 주로 남자를 잘 만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내 손톱과 손가락이 짧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손가락과 손톱이 길면 게으르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은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TV를 볼 때에도 '게으른 손'에 대한 잔소리는 이어졌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예쁜 연예인들은 자기 몸치장만 하는 게으른 인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뭉툭하고 짧은 손가락을 가진 나는 할머니에게 위안이자, 안심이자, 자랑이었다. 연설 중간중간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도 잊지 않았다.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데다가 야간 근무까지 하고 있는 아빠가 할머니에게는 안쓰러움이면서 자랑이었다. 아빠를 추켜세우기 위해 이 일 저 일 옮겨 다니면서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 이웃까지 끌어들였다.


  노인의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말이라며 반박했지만 그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뇌가 되었다. 성실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성실한 내가 대견했다. 그러다가 곧 그렇게 보일 뿐,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동시에 가늘고 긴 손톱을 가진 사람을 볼 때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예쁜 손가락과 손톱이 부러우면서도 그들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을 향한 평가는 곧 나에게 날아왔다. 이상한 우월감과 열등감이 자라면서 나야말로 진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타인에게 나의 쓸모를 맡기고, 그들의 평가에 따라 울고 웃으면서 점점 내 자리를 잃어갔다.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색해졌다. 그들이 가진 강점을 보려 하지 않은 채 선입견에 사로잡혀 타인을 규정했다.


  손은 그냥 손일 뿐이다. 부지런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냥 각기 다른 길이의 손가락과 손톱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에게 듣던 몇 안 되는 칭찬 중 하나인 그것을 깊게 새기고 있었다. 절대로 성실하고 싶지 않다면서, 엄마와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다면서 그 말을 믿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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