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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Mar 09. 2024

성실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 - 아빠


  아빠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가족들을 깎아내렸다. 스스로를 ‘위대하신 아버님’이라 칭하면서 나와 동생을 ‘간나새끼’라 불렀다. 아무래도 북쪽에 사는 독재자처럼 강력한 지위를 갖고 싶었나 보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는 아내와 딸들에게 ‘웃기지도 않은 저질 프로그램’과 ‘짜고 치는 억지 방송’을 좋아한다며 내내 듣기 싫은 소리를 했고,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경박하다며 화를 냈다. 특히 엄마에게는 심했다.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를 폄하했고, 엄마가 잘한 것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가 무언가를 요청하면 아빠는 신경질부터 냈다. 불편한 자세로 누워있는 아빠에게 베개를 줄 때에도 아빠는 화부터 냈다.      


  열세 살 무렵이었다. 아빠가 신시사이저를 샀다. 바꿔야 할 물건이 수두룩하고, 필요한 물건조차 사지 않는 우리 집에 신시사이저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놓을 곳도 마땅찮은데 어느 날 그게 우리 집에 왔다.      


  나는 그것을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 형편에 안 될 게 뻔했기에 갖고 싶다는  욕구조차 품지 않았다. 사줄까,라고 했던 건 아빠였다. 나와 동생은 기대했지만 아빠는 사준다, 안 사준다를 되풀이하며 약을 올렸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집에 왔다.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이 스스로를 ‘아버님’이라 높이고 나와 동생을 ‘간나새끼’라 비하하면서 “아버님께서 간나새끼들한테 큰돈을 쓰셨다”를 반복했다. 그날은 새로운 기계에 흥분해서 아빠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신시사이저를 세팅하자 아빠가 내게 쳐보라고 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앞부분은 외우고 있었기에 그 부분을 연주했다. 결코 잘 치지는 않았다. 나는 그쪽에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건반을 만져본 적 없는 아빠에게 베토벤의 명곡을 치는 딸은 경이로움이 섞인 놀라움이었다. 아빠가 곡 제목을 말하면서 칭찬하자 엄마가 내게 물었다. 그 노래 제목이 뭐라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빠가 끼어들었다. “야, 알려줄 필요 없어. 네 엄마는 무식해서 들어도 몰라.”     


  오래전 일인데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웃음과 감탄이 한순간 멈췄다. 바뀐 공기의 흐름을 타고 엄마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핏 본 엄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부끄러움과 서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굳은 엄마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매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했다. 엄마의 편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과 아빠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학교 종이 땡땡땡’을 쳤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건반을 누르면서 불편한 기억과 감정도 함께 눌렀다. 그런다고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질리게 하는 아빠의 소통방식과 마음을 할퀴는 언어폭력은 내 삶에 악영향을 미쳤다.       


  건강하지 못한 인정욕구는 사회생활뿐 아니라 연인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나는 그들에게 사랑이 아닌 인정을 원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똑똑하다, 멋지다, 대단하다, 현명하다 등의 찬사를 듣고 싶었다. 욕구가 컸기에 매번 좌절했다. 애인과 있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와 마주하면 무식이 드러날까 봐 화제를 돌렸고, 실수를 들키면 당황했다. 애인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멸감에 빠져 허우적댔다. 해결방법을 찾거나, 오해를 풀면 되는데 위축된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이별을 통보했다. 내게 상처 준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관계를 차단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서울 정도로 매정했다.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면서 더 깊이 마음을 숨겼다.     


  돌아보면 그들은 내가 느낀 것만큼 나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서로의 관심사가 달랐고, 잠시 말이 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얼굴이 벌게진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가 떠올랐다. 자식들 앞에서 무안과 서러움을 견뎌야만 했던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그들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는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이별을 망설이면 안 되기에 애인을 사랑하는 순간에도 늘 헤어질 궁리를 했다. 자식 때문에 산다거나, 그 사람 없이 못 산다는 이유를 만들면 안 됐다. 비단 남녀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다 그랬다. 나는 나의 못난 모습을 숨기고 싶어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래서 아빠로 대변되는 성실이 싫었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능력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힘을 갖고 싶었고, 그 힘을 통해 한없이 관대하고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었다.      

  

  아빠 못지않게 성실하게 사는 엄마를 보면서 그 생각을 더 굳혔다. 아빠의 성실은 넌더리가 났다면 엄마의 성실은 너무 고단하고 안타까워 화가 났다.     



능력 있는 자유인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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