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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H Oct 07. 2023

가난한 집에서 살아남기-Part2 청소년기

Ep28


Part2 -중학교 시절


청소년시기가 나의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우리 집이 가난한 편이라는 걸 더욱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아파트에 살고, 종합학원에 다니는 애들이었다. 학원차를 타고 다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대부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얌전한 아이들이 많았다. 브랜드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이키, 아디다스를 가지고 싶었는데 너무 고가라서 그런 것들은 신을 수 없었다. 항상 운동화 두 켤레로 몇 년을 신었다. 가방도 중학교 때 한번, 고등학교 때 한번 사주셨다.


우리 집의 가장은 엄마였다. 엄마는 새벽에 나가 저녁 8시 정도가 되어야 돌아왔다. 항상 힘든 엄마는 우리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도와주는 방법은 몰랐다. 엄마가 항상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1순위, 언니가 2순위, 내가 늘 3순위 같았다.


아빠는 일을 하러 나갔지만 항상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뒀다.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뇌졸중에 걸려 끊기 전까지 담배는 밖에서 피는 게 아니라 집 화장실 안에서 폈다.


아빤 우리에게 항상 이번 일을 하면 돈을 엄청 많이 벌거라고 했다. 하지만 끊기가 없어 핑계를 만들어 그만뒀다. 엄마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빠가 정말 돈을 잘 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우 확신에 차서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이던 내가 집을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말이 가난한 삶을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할머니에다 세 남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데 빚까지 있었고 엄마는 그 상황을 홀로 해결해 나갔다. 아빠는 옆에서 점점 이상해져 갔고 책임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 혼자 빚을 만들고 다시 갚고, 우리를 키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팔자가 안 좋아 이렇게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부자들을 욕했다. 집값은 떨어질 거라는 말을 믿었다. 다른 아빠들은 낮에 집에 없는데 우리 아빠만 자꾸 집에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가자 불안해했다. 엄마가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나 보다. 그 시기에 아빠가 자꾸만 사고를 치고 다니고 일을 계속 그만뒀다.


할머니가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일하러 가고 언니는 고3,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나에게 학교 끝나면 어디냐고 전화 오고 집에 있을 때는 자꾸만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집에 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화를 내가 다 받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할머니는 나에게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봐도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기분이 좋을 때 잘해줬다가 기분이 안 좋으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 화를 냈다. 나는 뭐든지 다 받아주고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자랐다.


 그 시기에 또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정확히 왕따를 당하거나 내가 피해를 본 것은 없지었다.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나를 제외하고 다 같은 반이 된 이후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학교에 가기 싫어 큰 병이 걸려서 학교에 갈 수 없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다.


중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래서 고등학교땐 훨씬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아빠는 계속해서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항상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왔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많이 목격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학교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고 믿고 뭐든지 열심히 했다.


아침에 일어나 미리 예습을 하고 영어 교과서를 다 외웠다. 계획을 세워 매일매일 꽉 채워서 공부했다. 책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다른 책을 사지 않았다.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질문했다. 봉사시간도 100시간이 넘도록 많이 했다.


나는 언덕 위까지 삼십 분 걸리는 고등학교에 버스비가 아까워서 걸어 다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멀리 나갈 때는 버스비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엄마가 용돈을 주지 않으셔서 티머니를 충전하려고 아빠한테 만원만 달라고 했다.


네 엄마한테 달라그래!


라고 화를 내는 아빠 모습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매일 사 먹는 술값은 안 아까우면서 딸의 교통비가 그렇게 아까웠나 보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용돈을 안 줘도 된다고 했다. 용돈은 한 달에 2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엄마가 사고 싶은 문제집을 다 사주고 공부하는 걸 응원해 줬다. 그렇기에 내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안엔 대학교에 간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언니가 집안 최초로 그래도 서울에 이름이 알만한 대학교를 갔다. 학원도 하나 다니지 않고 순수하게 학교, EBS로 공부한 것으로 갔다.


 부모님은 어떻게 대학교에 가는지에 대해 모르고, 아빠는 티브이만 보고 술만 마실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지 않았다. 엄마도 생활전선에 너무 바빠 내가 알아서 하기를 바랐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안 좋은 점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원을 못 보내더라도 검색이라도 해서 도와줄 수는 있었을 텐데, 중학교 때에도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성적인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고 대부분 특목고를 갔었다. 나는 학원에 갈 수 없으니 지식in 답변밖에 정보가 없었다.


  대학입시도 오로지 혼자 준비했다. 그땐 수시가 훨씬 많았고 나는 내신이 좀 좋은 편이라 유리했다. 하지만 스펙을 쌓는 법은 하나도 알지 못했고 어떤 게 나에게 적합한지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출신 학교도 다 가린다고 하던데 그땐 다 알았던 것 같다.


 고3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차별했다. 나는 대부분의 선생님과 관계가 아주 좋았고 회장도 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대입 상담을 하다가 부모님 직업을 보고는 비웃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부모님이 이런 직업인데 대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듯이 말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하는 학생을 응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나의 희망을 무시했다.


어쨌든 혼자 대학교 입시를 알아보고 분석해서 수싱에 지원했다. 다행히도 서울에 있는 학비가 저렴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곰팡이가 항상 있던 반지하 집. 겨울엔 미닫이 문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추웠다. 화장실도 너무 추워서 패딩을 입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너무 창피해서 친구들을 내 집에 데려오지 못했다. 우리 집을 보고 나를 안 좋게 생각할 것 같았다.


 식상하지만 가난해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한만큼 모든 보상을 받을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한 것 만으로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더 쉽고 편하게 갈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인생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진로를 선택해야 좋을지, 내 성향과 잘 맞는 일은 무엇 일지에 대해 부모님과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차분하게 진지한 대화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내가 가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다른길로 빠지지 않고 내 목표만을 바라봤던 것. 그게 내 고등학교 때 가장 잘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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