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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H Oct 08. 2023

가난한 집에서 살아남기-마지막

Ep29


대학교 1학년 때는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지냈다. 고등학교땐 대학교 때문에 늘 답답한 마음으로 살았지만 이젠 해방이 된 것 같았다.


 반지하 방에서 우리 집은 지상으로 집을 옮겼다. 하지만 원래 살던 곳에서 거의 300미터 정도 옆에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같은 동네라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에 집은 골목골목에 들어가야 했다. 가끔 학교에 갈 때 집 바로 근처에 있는 도박장에서 나온 사람이 노상방뇨를 하고 있기도 했다.


 집은 여전히 물이 새고, 그래서 항상 천정에 곰팡이가 살고 있었다. 나는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언니와 내가 방 하나를 같이 쓰고, 남동생이 방 하나, 엄마아빠 방 하나. 방이 작아서 책상이 하나밖에 없어 사실상 집에서는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 때까지는 최악은 아니었다. 아빠가 사고 치거나 술에 취해 엄마에게 시비 걸지 않는 날에는 우리 집은 그래도 화목했다.


 친척들은 집의 가장 큰아빠였던 우리 아빠가 점점 이상한 짓을 하다 보니 우리 집 자체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도 아빠 때문에 나를 무시했다. 이모는 너네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고, 너네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항상 말했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말했다. 언니, 내가 크기 시작하다 보니 아빠 욕을 많이 했다. 아빠가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고스란히 다 우리에게 전해줬다. 아빠가 또 뭔가 시작하고 싶다고 엄마에게 이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당연히 시작하고 한 달 만에 그만둘 게 뻔했기 때문에 절대 주지 말라고 했다. 대학교 등록금, 용돈도 못 받았는데 아빠의 말도 안 되는 꿈 때문에 몇천만 원을 주려는 엄마에게 오히려 실망했다.


내가 선택한 아빠가 아닌데 자꾸만 가족들은 아빠에게 우리가 설득을 해서 정상으로 살도록 만들어보라고 했다. 자기네들의 말은 듣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라고.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과 항상 연을 끊고 사는 아빠가 우리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 나도 시도는 해봤다. 어느 날은 아빠가 또 이 일을 하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빠 그거 벌면 엄마한테 100만 원이라도 생활비 줘’라고 말했다.


갑자기 분노가 폭발한 아빠는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네 엄마는 돈도 얼마나 잘 버는데 왜 자기에게 뭐라고 하냐는 식으로 말했다. 아빠는 돈에 관련해서 누군가가 의견을 제시하면 바로 폭발을 한다.

나는 아르바이트할 때도 짜증이 나고 힘들어도 다 참고서 하는데 아빤 왜 항상 그만두냐고 말했다. 아빠는 더 화가 나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죽여버린다고 했다. 물론 진짜 죽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우리 가족 중에 아빠랑 가장 가까운 사이었다. 아빠랑 성격이 가장 비슷했고, 어렸을 땐 아빠가 일할 때 같이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아빠가 갈대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일들이 있었고 성인이 된 이후로 아빠와의 애정은 점점 사라졌다. 나는 아빠가 나에게 등록금, 용돈을 주지 않아서 그래서 실망한 게 아니었다. 성인이 돼서 살아보니 아빠가 얼마나 책임감이 없고 참을성이 없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할 때에도 더럽고 치사한 일이 많았지만 참고했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는 일이 늘 거지 같은 건 어쩔 수 없을 테니. 아빤 좋은 기회들이 왔을 때에도 너무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일이 편할 때는 너무 지루하다고 그만뒀다. 주변에는 똑같이 가난하고 세상 탓만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또 다른 큰 사건이 일어났다. 엄마에게 이젠 이혼하라고 했다. 엄마는 이혼하면 우리가 결혼할 때 안 좋게 생각한다고 또 피했다. 나는 이혼한 가정보다 이런 이상한 아빠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욱더 끔찍한데. 사실엄마는 이혼녀가 되기 싫고, 아빠가 무섭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빠는 덩치가 크고 무섭게 생겼다. 아빠가 점점 밑바닥으로 내려오면서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원래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나는 살면서 부모님이 제대로 대화를 하는 걸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마와 아빠는 성향이 정반대다. 엄마는 성실하고, 돈 천원도 아껴 쓰고 자식들이 최우선인 사람이다. 반면에 겁이 많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피하려는 경향이 많다. 아빠는 무책임하고, 돈이 생기자마자 바로 써버린다. 대범하게 일을 저질러버리고는 뭔가 안 되는 것 같으면 도망가버린다.


피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 둘의 성향을 골고루 닮았다. 알뜰한 것은 엄마, 하지만 나도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게 아빠를 닮았다. 엄마를 닮아 사람들과 잘 지내지만 아빠를 닮아 가끔 욱하는 것은 조절하는 게 어렵다.


부모님이 서로 대화를 한쪽에서 시작하면 늘 싸움으로 끝났다. 아빠는 계속해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엄마는 조용히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습을 많이 봤다. 원래 연인, 부부의 사이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신기한 것은 나도 남자친구와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를 하지 못하고, 늘 입을 꾹 닫고 참거나 피한다는 것었다. 남자친구가 말도 안 되는 일을 했을 때 헤어지는 것도 힘들어했다.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닌데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일단 뭐든 도전하는 걸 무서워하게 된다. 시간을 들여 장기적으로 잘 되는 것들은 특히나 포기한다. 의전원이라는 제도가 많았을 때 학원이 너무 비싸다는 말에 바로 포기했었다. 붙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시도라도 해보지 않은 것에 후회한다.



꼭 가난하다고 환경이 안 좋은 것이 아닐 테지만 가난하면 집안의 분위기가 안 좋을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어렸을 땐 할머니가 하루 건너 하루 늘 화를 냈고 성인이 되었을 땐 아빠가 술을 먹고 자주 화를 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빠와 할머니 다 기분이 좋을 땐 아주 잘해주고 친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크다 보니 늘 경계태세로 살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떤 사람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너무 불안해지고, 내가 뭔가 잘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에게 화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스트레스다. 그 사람이 대충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마음이 놓인다. 일대 일로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집 안이 가장 편안한 것이 아닌, 뭔가 불안한 상황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밖에서 살거나 외국에 있는 동안 집이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환경이 이렇게 계속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정신적으로 안정적이기가 힘들다. 기분이 좋았다가 금방 우울해졌다가 나에겐 평온이라는 말이 가장 거리가 먼 말이다.


위기가 왔을 때 대처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차분하게 해결방안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법을 보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몇 년 전에 자취를 할 때, 내 어린 시절, 청소년기 등을 떠올리며 가족 원망을 많이 했다. 내가 왜 항상 불안해하는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가족들을 보며 너무 부럽기도 하고, 내가 잘못된 게 다 그런 환경 때문인 것 같았다.


 나도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아빠가 있었다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앞으로 갈 길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 주고 상담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안이 제일 편하고 늘 돌아오고 싶은 공간이었음 내 불안도 적지 않았을까.




지금은 서른이 되었고, 머나먼 외국에 와있다. 한국에 있을 땐 다시 그 불안감, 불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이렇게 먼 곳에 있을 땐 돈에 대한 불안 말고는 괜찮다.


지금은 모든 게 안 좋았던 것만은 아니니까 점점 상황을 객관적으로, 감정을 빼고 보려고 노력 중이다. 아빠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실한 엄마가 끝까지 키워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이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하게 해 준 것에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친척들 몇 분은 애정을 가지고 항상 우리 남매들을 돌봐주셨다. 지금도 응원해 주신다.


 가장 힘든 시기에도 항상 나를 응원해 주는 우리 친언니에게도 감사하다. 친언니는 내가 본 가장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언니를 낳아준 엄마에게 감사하다.


그 외에도 내 무모한 도전에도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도 고맙다. 갑자기 외국에서 의대를 가게 해준 것에 일부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아빠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좋은 추억을 주고 이런 도전을 하게 해 주어서 조금은 고맙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살아서 늘 필사적이고 독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유학하면서 더 깨닫는다. 학교 식당이 너무 비싸 집에서 늘 해 먹고 즐기는데 돈을 쓰지 않는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독하고 절박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가진 것에도 감사하다. 앞으로 무사히 공부를 끝내고 의사가 될 때까지 늘 감사하고 절박함을 가지고 있길 바라며..!


가난한 집에서 살아남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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