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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마는 것들의 아름다움

by 일뤼미나시옹

먼저 눈앞에 놓인 이 작품의 물리적인 실체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작품명: Gilded Blossom (길디드 블라썸)

작가: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

제작년도: 2021년

재료 및 기법: 두꺼운 종이 위에 유채 (Oil on card), 임파스토(Impasto) 기법

크기: 84.2 x 59.6 cm (약 30호 크기)

이 작품은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데미안 허스트가 팬데믹 기간 중 제작한 '벚꽃(Cherry Blossoms)' 연작 중 하나입니다. 약 84cm 높이의 이 화면은 압도적인 대형 벽화는 아니지만,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물감의 두께감 덕분에 실제 크기보다 훨씬 묵직하고 거대한 존재감을 발산합니다.




이 그림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거리 조절이 필수적입니다.


멀리서 볼 때 (인상주의적 풍경): 세 걸음 뒤로 물러나 보세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가 보입니다. 빛과 색의 조화를 중시했던 반 고흐나 모네의 풍경화처럼, 무수한 색점들이 모여 평화롭고 서정적인 봄의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가까이서 볼 때 (추상표현주의적 에너지): 이제 아주 가까이 다가가 보세요. 꽃잎은 사라지고, 거칠게 엉겨 붙은 물감 덩어리만 남습니다. 작가는 붓을 캔버스에 내던지거나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과 액션 페인팅을 사용했습니다. 우아한 꽃 그림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작가가 2년간 작업실에서 땀 흘리며 물감과 벌인 치열한 육체적 사투의 흔적임을 알게 됩니다.


벚꽃이 왜 아름다울까요? 아마도 그것이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순간, 미련 없이 져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벚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 흩날리는 풍경 앞에서 애틋함을 느낍니다. '지고 마는 아름다움', 그것은 곧 삶과 죽음의 순환입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평생 '죽음'이라는 주제를 차갑고 충격적인 방식(포르말린에 절인 상어, 해골 등)으로 다뤄왔습니다. 하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작가는 이제 날 선 칼 대신 묵직한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빨리 시들어버리는 벚꽃을 가장 두껍고 무거운 유화 물감으로 화폭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제목인 *<Gilded Blossom>*은 '금박을 입힌 듯 화려한 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화려함은 찰나입니다. 작가는 바람이 불면 곧 사라질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끈적하고 두터운 물감 속에 영원히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시들어가는 시간에 대한 예술가의 저항이자, 죽음(지는 꽃) 속에 생명(영원한 그림)을 불어넣는 행위입니다.

여기, 캔버스 위에는 영원히 지지 않는 봄이 있습니다. 두껍게 쌓아 올린 저 꽃잎들은 중력을 거스른 채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꽃은 지고 말지라도, 예술이 붙잡아 둔 이 찬란한 순간만큼은 당신에게 영원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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