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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주 Aug 15. 2024

할아버지의 조작된 항일 역사

모든 부정에 대한 저항

제목이 거창하지만, 일종의 어그로다.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일제시절인 1914년 5월 21일에 경상북도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때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2대 황제인 순종이 이름만 남아있던 시기였다. 지난 글에서 말했지만, 우리 집안은 심히 가난한 상황인지라, 나라 잃은 설움보다 배 곯지 않는 일이 더 중했다. 할아버지가 21살이 되시던 1935년에 19살 고운 아내를 맞이하셨지만, 없는 형편에 먹고살 길이 녹록지 않으셨으리라. 부쳐 먹을 땅도 없으니 온 가족은 몸뚱이 하나로 돈 되는 일이면 다 해야 했다. 그나마 손재주가 좋으셔서 할머니는 온 동네 바느질거리를 받아다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챙기셨다. 


1936년 두 분 사이 첫째 아들(나의 큰아버지)이 태어났고, 얼마지 않아 할아버지는 큰돈 벌겠다며 친척 누군가와 만주로 장사를 떠나셨단다. 1932년 일제가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제국을 선포한 이후 국토개발이 한창인 분위기에 많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정부도 누구나 대지주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했고,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 자식태어나고 느낀 가장으로서 책임감에 만주행을 결정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어수룩한 시골 양반이 만주 가서 장사를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챙겨간 자본금 푼도 금세 털어먹고는 년 안 돼 돌아오셨다. 


할머니는 큰돈 벌어오지 못했다는 속상함 보다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소식 전할 길도 없는 마적단 소굴 같은 먼 타국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시골 새댁은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며 걱정으로 하루하루 사셨다. 그렇게 떠나간 지 몇 년, 돈 몇 푼 보다 귀한 목숨 부지하고 왔으니 다행스럽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다시 타지로 떠나보내셔야 했다. 이번엔 일본의 징용 탓이었다. 


1938년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가 필요해진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한다. 그리고, 봉화라는 시골동네에 까지 징용의 손길이 뻗쳤다. 당시 징용령에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던 건 아니었다.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김승기 어르신은 영주, 봉화 지역에서 징용 거부운동을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셨단다. 만주에서 빈 손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일본에 끌려가신 건지 아니면 돈 벌겠다고 스스로 선택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만주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돼 일본의 채석장으로 가신 것만은 사실이다. 그곳에서 중한 노동을 이어가시다가 굴러 떨어지는 돌이 정강이를 때리는 바람에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하셨다. 이후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으셔서 한쪽 다리를 편히 쓰지 못하시는 신세가 되셨다. 현장에서 노동을 못하게 되자 한 동안 그곳 사람들 머리 깎는 일을 하셨단다. 그러다 1944년 고향으로 돌아오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할아버지가 다치시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고향으로 돌아오신 게 천만다행이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귀국을 희망했지만 돌아오는 배편이 충분치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있던 배들 중에도 태풍이나 사고로 승선자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가족에게도 해방의 기쁨이야 있었겠지만, 할아버지와 같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그들의 빈곤한 삶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1947년생 둘째 아이로 예쁜 딸(나의 고모)을 얻었고, 몇 년 뒤 둘째 아들(나의 아버지)과 막내아들(나의 작은 아버지)을 낳으셨다. 조작된 항일역사는 바로 작은 아버지의 입으로 만들어진다. 할아버지의 유머 감각을 물려받은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만주행을 독립군 운동자금 전해주러 목숨 걸고  가신 거라며 농담을 하셨고, 일본으로 징용 가신 것도 이발 기술을 배워 천황에게 접근 후 암살하겠다는 독립운동의 일환이라 너스레를 내셨다. 모두들 재미난 농담으로 듣고 하하 호호 웃어넘겼지만, 5살 난 사촌동생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구경을 갔는데, 독립운동가의 사진들 속에 우리 할아버지가 없냐며 울먹였다. 많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거기서도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비밀로 했으니까 이 사람들도 모르제"


하며 말도 안되는 농담으로 딸을 달래셨다. 사촌동생이 조작된 항일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알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대를 사셨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 대부분은 그저 먹고사는 일에 치여 가족 돌볼 형편도 빠듯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살았던 대다수의 조선인을 생각해 볼 때, 가진 재물 나누고 귀한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 분들의 희생이 결코 가벼이 여겨질 수 없다. 그렇다고 진저리 나는 일상의 가난을 이겨내신 할아버지의 삶도 가볍지 않다. 단지, 오늘을 핑계 삼아, 그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남일 보듯 인사치레 축하가 아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생일축하하듯 진심을 담아보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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