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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logic Oct 14. 2022

글자를 만들어서 먹고 산다고??

글꼴 만드는 악필 프로그래머


공대를 나온 내가 외국계 컴퓨터 회사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 일을 하다가 뉴욕으로 가서 프로그래머 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서울에 들어와 "폰트"회사를 설립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 대부분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글자라는 상품 자체가 가지는 가치를 이해하지도 못했던 시절이기도 하고, 글자보다 더 큰 무엇인가에 뜻을 두어야 하지 않겠냐는 나름의 기대와 실망이 교차된 의견이었다. 


글자는 우리 생활에서 그 사용 정도에 비하여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상품이다.


거기다 가족과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내가 적어둔 노트를 내가 읽지 못할 정도의 악필이 갑자기 글자 사업을 한다니, 가족들은 나의 결정을 신뢰하기 심히 어려웠을 것이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불을 끄고 떡을 썰며 아들의 글 솜씨를 확인해 보았다지만, 내 가족들은 굳이 촛불을 끄지 않아도 내 손글씨의 수준을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글꼴과 글꼴 관련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사업을 하였고, 이제는 90% 이상 은퇴를 한 시기가 되었다.

나는 직접 글꼴을 디자인할 능력은 없었지만 글꼴의 디자인 기획 단계부터 영업과 기술적 지원 그리고 글꼴 이름을 짓는 일까지 대부분의 과정에 참여하였고, 모든 업무를 집대성하였다. 당연히 우리가 만든 글자 하나하나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타이포그래피 클래스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내가 처음 접했던 글꼴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었다. 뉴욕 한국계 신문사의 조판 시스템을 개발할 당시 입력기의 폰트를 만들기 위해 간단한 비트맵 폰트 편집기를 만들고, 내가 직접 폰트를 개발하는 일까지 참여했었다. 점을 하나씩 찍는 지겹기 그지없는 작업이었다. 


나 역시도 글꼴 자체가 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스티브 잡스의 인생에 비교할 바 아닌 미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내가 글꼴에 눈을 떴던 시점은 뉴욕과 서울에서 두 명의 뛰어난 글꼴 디자이너를 만난 시점이었다. 워싱턴 DC의 안정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이 디자이너들의 의견에 이끌려 서울로 왔고 글꼴 회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나를 서울로 이끈 두 명의 글꼴 디자이너들은 디지털 글꼴로 상품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던 분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사람이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다.


아날로그 글자에서 디지털 폰트로


당시에는 글자가 새겨진 네거티브 필름 모양을 한 글자판을 수동 식자기에 올려놓고 인화지에 글자 하나하나를 사진 찍는 형태로 조판을 하던 식자 산업이 존재하였던 시점이고, 이 인화지를 현상하여 나온 종이를 잘라 붙여 책, 신문, 인쇄물 등을 만들던 업체들이 아직 살아남았던 시기였다.

한 때는 식자용 장비 1대의 가격이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이었다는 과장 섞인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꽤 돈이 되는 사업 영역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련한 시기이기는 하나 그런 세상, 그런 시장이 있어서 지금 현재 글꼴을 팔아먹고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글꼴 세상의 한가운데 들어섰고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좌충우돌 글자를 배우며 우리 회사만의 글자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모든 글자들이 내가 배울 텍스트북이었고, 수동 식자 오퍼레이터부터 컴퓨터 엔지니어까지 모두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배워가며 만들었던 수많은 비트맵 폰트 / 트루타입 폰트 / 포스트스크립트 폰트 / 폰트 에디터 / 글꼴 속성 편집기 / 식자 편집기 등등 글자와 파생 상품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 글에서 지식을 얻기보다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글자에 대한 잡담을 한번 들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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